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고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1926년경 겨울 눈이 내리는 어느 안동 고을에 아가가 아팠다. 아마 한 번쯤은 꼭 겪어야 하는 홍역을 치르고 있을 듯싶다. 그러나 그것에는 의원도 약방도 없는 시골 산골 마을이다. 다만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있었다.
그 때 이윽고 눈 속을 헤치고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아~ 그것은 아버지가 전해오는 열일 내리는 약이다. 그 아가는 산수유를 끓인 물을 먹고 아버지의 차가운 옷자락에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면서 살아났다.
그날밤이 어쩌면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제처럼 환희로운 날이었을지 모른다 했다. 이 아가가 어느덧 30년이 지나면서 자라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1955년에 이 시를 써서 세상에 내 놓았다. 참으로 시인은 다르다.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사는 철없는 그 아기 때를 어찌 기억하고 이 시를 썼다는 것인가?
“옛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 / 이제 반가운 옛날 것이 내리는데 // …”
그 때 아버지가 가져온 산수유 열매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를 아버지 앞으로 달려가게 하고 있다. 눈 오는 겨울과,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 그리고 나와의 만남. 참으로 절창의 노래다.
김종길(金宗吉) 1926~2017. 경북 안동 출생. 시집에는 <성탄제> <하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