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이야기(7)판소리 여왕들 진채선ㆍ배설향ㆍ이화중선과 순창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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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이야기(7)판소리 여왕들 진채선ㆍ배설향ㆍ이화중선과 순창의 인연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2.0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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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숨겨진 이야기(7)- 순창군민이 꼭 알아야 할 의미 있는 이야기, 또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순창 관련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사실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판소리는 본래 무당 가계 남자들의 창조물이었는데, 19세기 후반 신재효 문하에서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이 배출된다. 이어 허금파배설향이화중선박녹주김소희 등이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여자 명창들이 더 많이 활동하게 되었다. 이 중 진채선배설향이화중선은 순창 출신은 아니지만 순창과 깊은 인연이 있는 여류 명창들이다.

 

진채선 - 김세종에게 지도 받은 최초 여자 소리꾼

최근 새로운 사실 밝혀져

판소리를 전업으로 하는 첫 여성 소리꾼이 누구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19세기 후반 공식적인 최초의 여자 소리꾼이 등장했으니 바로 진채선(陳彩仙1847?)이다. 그녀는 고창군 심원면 검당포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 당골 학습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익힌 노래 솜씨가 당골 학습 선생에게 알려져 소리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소리를 가르치던 선생이 다리를 놓아주어 신재효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게 된다.

이때 진채선에게 체계적으로 소리를 가르친 사람이 바로 신재효 집에서 소리 사범 노릇을 한 순창 출신 김세종 명창이다. 진채선은 <춘향가><심청가>를 잘 불렀고, 기생점고’(妓生點考) 대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소리공부를 마친 진채선은 1867년 한양으로 올라가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참여하는데, 이때 그녀를 데리고 간 사람도 김세종이었다.

낙성연 잔치에 참가한 진채선은 <춘향가> 사랑가와 신재효가 손수 지은 <성조가(成造歌)> 등을 불렀다. 좌중은 진채선의 고운 외모와 춤 솜씨, 빼어난 소리에 매료되었다. 공식적인 첫 여류 명창의 출현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남겨진 진채선 관련 이야기는 거의 풍문 수준에 불과하다. “판소리에 일가견이 있던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매우 흡족해 하며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했고, 그녀의 판소리 실력은 운현궁 대령기생이라는 한계 상황에 가로막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거나, “대원군 실각과 스승 신재효 타계 후 자취를 감춰 이름 모를 암자에 묻혀 세상을 마쳤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만 전해오며 그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끌고 있다. 기존 자료나 영화 <도리화가> 내용과 달리 진채선은 1867년의 경복궁 낙성연 대회 후에도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향리(鄕吏)집단 연구 권위자인 이훈상 교수(동아대 사학과)는 신재효가 고창 인근 지역인 영광장성순창, 그리고 영암 향리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발굴해 공개했다. 그가 역사학보(20136)에 발표한 <19세기 후반 신재효와 여성 제자들, 그리고 판소리 연행의 변화>라는 논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채선

진채선은 1872년에 부안과 영광에서 연행했으며 이어 각 지역의 초청을 받고 계속 연행(演行)했다. 영광 향리 조은혁이 18791224일에 신재효에게 보낸 편지에는 진채선이 영광에 들려 연행한 사실이 확인된다. 진채선의 연행을 지적하면서 영광 읍성을 거의 흔들어놓았다면서 그녀를 국창(國唱)’으로까지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공연이 영광읍민을 얼마만큼 열광하게 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영광 향리 김대욱김응선 부자는 1873223일부터 1874316일까지 11개월에 걸쳐 네 통의 편지를 신재효에게 보냈다. 이 편지 내용은 부안영광 군수들의 수청 요구와 이에 대한 진채선의 단호한 거부를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진채선의 당찬 성격과 주체성을 엿볼 수 있다.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진채선이 대원군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면 앞서 두 지방관과의 갈등은 생각하기 어렵다. 더욱이 18732월 이전이라면 대원군이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시기였다(대원군 집권기는 18641873).

한편 187926일자 편지에서 순창 향리 임두학은 신재효 제자 중 한 명인 운아(雲娥)가 순창에서 연행을 마치고 고창으로 돌아간다고 보고했는데 이것으로 보아 순창관아에서도 판소리 공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설향 - 장판개 명창의 제자반려자

순창으로 귀향해 제자 양성

배설향(裵雪香18951938)은 이화중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 인기 여류 소리꾼이었다. 1895년 남원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 한 번 들은 소리는 바로 기억해 그대로 따라 불렀으며, 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자주 소리를 시켰다고 한다. 얼굴도 예쁜 배설향의 재능이 음악 쪽으로 나타나자 어머니는 그녀를 명창으로 키우기 위해 당시 순창에서 활약하고 있던 금과면 삿갓대 출신 장판개 명창에게 보내 소리공부를 시켰다.

▲배설향

12세 때 장판개에게 <흥보가><춘향가><심청가><수궁가> 네 바탕을 배웠다. 판소리에 입문한 지 불과 5년여 만에 판소리 본질을 터득하는 등 빠른 향상에 스승인 장판개도 놀라워했다. 1915년 서울로 올라가 장안사연흥사 등의 창극 공연에 장판개와 함께 출연, 여류명창으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대중의 인기가 크게 오르자 송만갑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창극단 협률사 단원으로 배설향을 영입해갔다. 배설향은 협률사에서 송만갑은 물론 이동백 등 국창들의 뛰어난 기예를 직접 보고 들으면서 실력을 연마해 나갔다. 그녀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갔다. 공연이 끝나면 그를 보려는 인파가 무대 위까지 몰려와 창극단 측은 공연 때마다 특별 경비를 세울 정도였다.

서울에서 활약하다 장판개와 함께 전주를 거쳐 경북 경주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지냈다. 1935년 장판개와 함께 순창으로 귀향해 살면서 조카딸 장월중선에게 흥보가와 가야금산조를 가르쳤다. 장판개가 병사한 그 이듬해인 1938년 배설향도 스승이자 남편이었던 장판개를 잃은 슬픔으로 43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기는 흥보가중에서 박타는 대목으로 알려져 있다.1928년에 남도잡가 흥타령’, ‘개고리타령을 녹음한 콜럼비아 음반이 남아 있다. 그밖에 <춘향가> 옥중가추월강산을 녹음한 소리가 전하고 있다.

 

이화중선 - 조선을 뒤흔든 판소리 최고 여류 스타

적성 매미터에서 소리 공부

 

이화중선

일제강점기 판소리 최고 여류 스타였던 이화중선(李花中仙18991943). 그녀가 <심청가> 한 대목인 추월만정’(秋月滿庭)을 부르면 조선 여인들은 모두 따라 울었단다. 서정주 시인은 그녀를 하늘 아래서 제일 서러운 소리를 하다 간 사람이라 했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약했던 명창들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이화중선의 경우 유독 사실과 허구, 진실과 신화가 얽혀 있다. 이런 이화중선의 흔적을 찾는 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남원시 소속 공무원으로 퇴임한 김용근 씨다. 그가 수십만 장의 고문서를 뒤져 찾아낸 옛 명창들의 흔적 속에는 이화중선과 장득진의 호적이 있었다.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운림리 549번지 호주 장득진

첩 이화중선, 생년월일 1899916, 부 이춘실 모 김씨의 장녀, 본관 전주

 

이화중선은 1894년 목포에서 아버지 이춘실과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김 씨 사이에서 갈빗대 하나가 없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3살 때 어머니가 죽자 부산 동래 작은할아버지 집에 맡겨져 8년을 얹혀살았다가 12살 되던 해 아버지가 있는 남원으로 오게 되고, 광한나루 근처 어느 술집에서 허드렛일로 살아가게 된다. 어린 화중선은 귀 너머로 들은 소리를 곧잘 따라 했다. 남원 한량들은 13살 된 그녀를 김준팡(김정문 명창의 부)에게 민요를 배우게 하고, 장득진에게 판소리도 배우도록 주선했다.

이화중선의 소리선생 장득진(1884~1928)은 순창 출신 장재백 명창의 조카다. 이화중선은 17살이 되던 해, 1915118일 장득진의 첩으로 호적에 올랐고, 실제 그렇게 살았다. 2년 후인 1917, 장득진과 이화중선은 적성면 운림리로 이주했다.

적성면 사람들은 장득진이 큰 무당으로 소리를 했는데 이화중선이 당시 32세의 그에게 소리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적성면 운림리 임동마을 549번지, 사람들은 그곳을 매미터라고 부른다. 매미터는 소리꾼들의 득음을 향한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고 들리는 매미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노인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적에 이화중선이 이곳에서 살면서 다른 무리들과 앞산을 돌며 북과 장구에 맞춰 소리를 하는가 하면, 마을 입구 꾸지나무에다 줄을 매고 그 패거리들이 줄타기를 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증언했다. 대략 1920년대 초반의 일인 듯하다.(주간동아2004, 10, 04)

이화중선은 22살이 되던 1921년에 장득진을 떠나 상경했다(장득진은 어린 화중선을 명창으로 길러냈지만 재미를 보지 못한 채 1928년 작고한다). 조선권번에 기적(妓籍)을 두고 송만갑이동백의 지도를 받아 더욱 정진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대회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이화중선은 이날 대회에서, <심청가> 추월만정을 불러 그때까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설향을 압도하고 최고의 여성 소리꾼으로 군림하게 된다. <추월만정>(秋月滿庭)은 뜰에 가을 달빛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황후가 된 심청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대목이다. 1923년 이후 <추월만정>은 이화중선의 최고 히트곡이 되어 이화중선의 등록상표나 마찬가지인 노래가 되었다.

이화중선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는 실물을 남겨놓은 최초의 여성 소리꾼이다. 그녀는 투명하게 맑은 음색으로 높고 어려운 대목을 힘 하나 안 들이고 가뿐하게 넘겼고, 아름답고 고우면서도 단단한 창법을 구사했다. 이런 높고 고운 음색은 유성기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화중선은 음반과 라디오, 극장이라는 근대적 매체가 만들어낸 최초의 판소리 스타였다. 그녀의 출현은 판소리사에 혁명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여류 명창이 대거 출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 등장 이후 제2의 이화중선을 꿈꾸는 여류 명창들이 나왔고, 숫자나 인기 면에서 남자 명창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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