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35) 구림 운북리, 순창에서 가장 높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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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35) 구림 운북리, 순창에서 가장 높은 마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2.0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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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북리(雲北里)는 구림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구림면 서북단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밤재를 통해 쌍치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 가능골과 구시밭등간대꽃이개정이 등을 지나 방화리와 이웃한다. 남으로 월정리 장암마을과 경계를 이루며, 세자봉(700.9m)이 쌍치 전암리와 서쪽 경계를 이룬다.

조선 후기에는 순창군 무림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운앙리(雲泱里)와 율북리(栗北里)를 병합해 운항의 자와 율북의 자를 합해 운북리라고 했으며, 1935년 무림면과 구암면을 병합한 구림면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리로 운항리(蕓項里)와 단풍정리(丹楓亭里)가 있다.

운항마을 유래

운항(雲項)마을은 조선 선조 때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정착해 이룬 마을이다. 여분산 아래 구름 속에 싸여 있는 용처럼 주변이 조금도 틈이 없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순창군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해발 400m에 형성된 마을이며,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는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1935년 운항으로 개칭했다. 20211031일 기준 인구는 38세대, 63(35, 28)명이다.

운항마을 전경
운항마을 전경

 

단풍마을 유래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다. 마을 둘레 산들이 마치 꽃송이를 이루고 있는 절경으로 중국 고사에 나오는 황국 단풍을 본 따서 단풍정, 단풍쟁이라 불렀다.

전주 이씨(全州李氏)삭녕 최씨(朔寧崔氏)초계 최씨(草溪崔氏)진주 강씨(晉州姜氏)가 모여서 처음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20211031일 기준 인구는 29세대, 54(23, 31)명이다.

단풍정이마을 전경
단풍정이마을 전경

 

질재골과 구림저수지

질재골은 쌍치면 경계에 있는 세자봉과 구림면 운북리에 솟아 있는 여분산 사이의 협곡이다. ‘도령동(道嶺洞)’을 의미대로 발음한 길재골에서 유래했다. 질재골은 해발고도가 높아 7, 8월 평균 최고 기온이 27~2830이상인 다른 지역보다 훨씬 낮다.

순창읍에서는 국도 21호선을 따라 구림면 소재지를 지나 운북리에서 여분산 방면 이정표를 찾아 들어가면 되고, 정읍 시내에서는 국도 21호선을 따라 개운치를 넘어 쌍치면 소재지와 쌍치 밤재를 지나 운북리에서 접근할 수 있다.

질재골은 수원이 풍부해 일찍이 구림저수지도 완공되었다. 1960년 질재골 입구에 축조한 구림저수지는 1127000톤의 저수 용량을 갖춘 순창군 최대 농업용수 공급용 저수지다.

질재골 누석단
질재골 누석단

 

갱정유도회

갱정유도회(更定儒道會)는 구림면 출신 강대성(姜大成)1929년에 창교한 종교단체다. 외부적으로는 유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은 유불선 합일이며, 정통 유교와는 다르다.

이들은 남북 분단과 관련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발생했지만, 이데올로기 때문에 피를 흘리고 대립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동족인 남북한은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전통사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민족주체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구림면 세자봉과 여분산 사이에 질재골 도령동으로 들어가 성당(학당)을 짓고 200여 명이 상주하며 수도했다. 교도들에게 강학할 때는 도인(道人) 10만 명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회문산으로 가는 구림면과 인계면 일대에 신도들의 흰 도포자락이 10를 잇는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교조 강대성은 1954년 이승만 정권에 체포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1965년에는 신도들이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상경 시위를 했다가 박정희 정권에게 탄압 받았다. 정권의 탄압을 피한 일부 갱정유도 신자들은 지리산 산기슭 하동군 묵계리로 은둔해 폐쇄적인 자급자족형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것이 청학동마을의 시작이다.

우리나라 주요 종교행사가 있을 때 한국민족종교협의회의대표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남원에 총본산이 있다.

1970년 8월 어느 이른 새벽 갱정유도 본부를 향해 가는 교도들 - 고 강을선 제공
1970년 8월 어느 이른 새벽 갱정유도 본부를 향해 가는 교도들 - 고 강을선 제공

 

무림면 단풍정 사건

일본 사이의 정전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이 재차 조선을 침공해온 정유재란. 1597년 일본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816일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 주력 부대는 전주로 향하게 되고, 일부 부대는 두 갈래로 순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한 갈래는 순창읍내로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팔덕면 방면으로 들어왔다.

당시 순창군수 배경남(裵慶男)은 가족과 함께 산속으로 도망했고, 일본군 500여 명이 순창에 무혈입성했다. 이에 읍민들은 피난 짐을 꾸릴 시간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했다. 일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백성들을 학살했다.

이때 일부 사람들이 서쪽 무림면(茂林面) 단풍정(丹楓亭)으로 피했으나 모두 학살당했다. 무림면 단풍정은 현재의 구림면 운북리 단풍정마을이다.

 

6.25 아픔 간직한 여분산

여분산은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통로로 산채가 있었다 하며, 현재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인접한 전라남도 가막골에 빨치산 전라남도 도당사령부가 있어 구림면 안정리에 있던 전라북도 도당사령부와 연결 고리였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산이다. 소설 남부군저자 이태(李泰)는 여분산 기슭에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있다가 회문산 장군봉 대수말 계곡으로 옮겨 활동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분산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남으로 호남정맥 용추봉과 무등산, 동으로 지리산 연봉들이 마루금(능선)을 이룬다. 서로는 용추봉과 세자봉이 눈앞에 펼쳐진다. 북으로는 쌍치와 산내의 오두봉, 깃대봉이 자리하고 북동쪽으로는 장군봉과 회문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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