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농부(18)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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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농부(18) 선물
  • 차은숙 글짓는농부
  • 승인 2021.12.1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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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숙(글짓는농부)

연말이다. 아무리 코로나 때문에 난리여도 크리스마스 무렵 생각나는 건 선물이다. 가족이나 친구끼리 케이크에 불 밝히고, 위대한 탄생을 기뻐하고,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를 맞는 소망을 빌며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풍경이 그려진다.

 

보일러 고장, 쥐의 선물

올 연말, 나는 조금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조금 이상스럽기는 하지만 쥐의 선물이다. 처음에는 선물인 줄도 모르고 속상해했다. 한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보일러 에이에스(AS)를 불러 살펴보니, 배관에서 누수가 된다는 것이다. 원인은 쥐가 들어와 하부 배관 연결 부위를 갉아먹은 것이란다. 정말이지 쥐도 새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다.

보일러 배관 수리는 두어 시간 만에 끝났다. 작은 쥐 한 마리가 벌인 일이 마무리된 듯했다. 그런데 배관 앞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는 기사님의 조언을 따라 다용도실을 정리하면서 12일의 대대적인 집안 정리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한 일은 다용도실에 있던 김치냉장고를 주방으로 복귀시키는 일이었다. 그러자니 주방에 버티고 있던 그릇장을 작은 방으로 치우고 작은방에 있던 진열장을 거실로 옮기고, 또 책장을 옮기고집 안의 가구 배치에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이었다. 이사 온 지 몇 년째인데 똑같았던 주방에 선반을 짜고, 수납 바구니를 사서 종류별로 갖가지 통조림과 라면과 국수, 조리용 재료들을 정리했다. 새로 정리된 주방을 보는 기쁨은 생각보다 컸다. 내친김에 싱크대 서랍 속 물건들이며 그릇장 속에 잠만 자던 오래된 그릇들을 꺼내 분리하고 버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은 또 저장고 속에 쌓여 있던 음식들을 살펴보고 정리하고 버리는 일이었다.

쥐가 보일러 배관을 갉아버린 덕분에 집안 곳곳이 정리됐고 보란 듯이 산뜻해졌다. 그 쥐 아니었으면 변신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이렇게 정리하고 바꾸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보일러 고장이 쥐의 선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온 집안을 정리하며 보니 쓰지도 입지도 먹지도 않는 물건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읽지도 못하는 책은 더 많고!

내가 꾸리고 있는 삶 속에도 집의 그릇장, 저장고, 책장 속에 있는 무엇처럼 한 번 꺼내 쓰지 않는 것, 거기서 먼지만 덮어쓰고 더 오래되면 아니 지금 당장 버려야 하는 게 무엇인지 살펴야 할 것 같다.

 

백해무익,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

얼마 전에는 하우스 시설을 점검하다가 보온 커튼 아래를 들춰본 적이 있다. 생쥐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머나! 깜짝 놀라 소리 먼저 친 다음에 보니 작은 들쥐였다. 사람을 만났으면 달아나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재빠르게 왔다 갔다만 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커튼을 더 들춰보니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나 될까 싶은 작은 새끼 쥐가 예닐곱 마리 모여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털도 없었다. 막 태어난 것들의 생명도 어미 쥐의 애면글면도 안타까워서 짐짓 모르는 척 보온 커튼을 그대로 덮었었다. 살다 보면 백해무익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들도 만나게 마련이다.

선물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선물은 물건이나 돈, 재능이나 봉사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떠올릴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감과 위로, 배움, 기쁨 같은 감정을 주고받는 것도 선물일 수 있다.

정말이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참 좋은 선물을 많이 받았다. 어쩌다 농부가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되었다. 나름 예쁜 이름의 농장 주인이 되어, 내년 봄에도 잘 지은 농사로 인사드리겠다는 문자를 보낸다.

 

순창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연도 선물

순창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연도 큰 선물이다. 착한 일을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은데앞으로 더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봄밤의 산책, 앞마당부터 농장까지 주둔하는 안개, 언제나 든든하신 당산나무님, 한 번씩 마실 가듯 향가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의 물빛, 강천산의 걷는 길까지도 고맙다.

짐작보다 더 노동으로 땀 흘리며 흙을 만지고 풀을 뽑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일이 몸에도 맞고 마음에도 기쁘다.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글농부라는 이름으로 농사 일기를 쓰는 것도.

올 한 해 농사는 끝내고 나니,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처럼 헛헛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십이월이 지나야만 열 두 장짜리 새해 달력을 받을 수 있으니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한겨울 농장에서 자라는 청보리의 푸르고 힘찬 기운으로 새해가 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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