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36)인계 지산리- 건지산과 지산사가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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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36)인계 지산리- 건지산과 지산사가 있는 마을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2.2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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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리는 인계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동쪽으로 적성면 지북리, 서쪽으로 노동리, 남쪽으로 유등면 오교리, 북쪽으로 중산리와 인접해 있다. 사면이 산으로 에워싼 산간 분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응달뜸과 지산골, 가목정이(柯木里가목리)를 합해 지산리(芝山里)로 병합했다.

행정리에 지산마을과 가목마을이 있다. 20211031일 기준 지산마을은 36세대 73(43, 30)명이, 가목마을은 36세대에 803(31, 49)명이 거주하고 있다.

지산마을 전경
지산마을 전경
가목마을 전경
가목마을 전경

 

마을 유래

지산마을은 건지산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을 건지뫼라 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목정이 등을 합해 지산리라 하였다.

가목마을은 처음 황규(黃奎)라는 사람이 터를 잡고 살면서 황씨 집성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본래 마을 이름은 가목정이었는데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에 약 250여 년쯤 되는 참나무가 있다.

 

건지산과 방정지 설화

건지산(乾芝山412m)은 원래 수지산(水池山)이었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물은 그 양이 많아 방정지(芳庭池) 들판 전체가 저수지였고, 거기에는 항상 맑은 물이 가득했다. 그래서 신선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못이었다.

그런데 물이 풍부한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물이 워낙 많아 방정지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수시로 수해를 입고 농사철에 많은 피해를 당해 사람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한 도승이 마을 사람들의 불평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저 산을 수지산이라 부르지 말고 건지산이라 부르시오. 그리하면 물 때문에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도승의 말을 믿고 모두 수지산을 건지산이라 불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건지산에서 발원하던 물줄기가 모두 말라 버렸고, 수원지가 없어지자 방정지는 거대한 농경지로 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들을 방정지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방정지들 군데군데 들샘이 솟아나와 농사를 짓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지금도 건지산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은 거의 없는데도 지하수가 풍부해 마을 사람들의 식수나 농업용수는 부족함이 없다 한다.

건지산
건지산

 

지산사(芝山祠)

지산마을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최치원최익현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우다. 1925년 순창 유림의 공의(共議)와 후손의 성금으로 통일신라시대 인물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대한제국 말 의병장이자 학자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학덕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영정을 봉안했다.

처음에는 건지산(乾芝山) 아래 지산리 응달뜸에 창건해 향사하다가, 1981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건물이 많이 훼손되어 2013년 강당과 고직사를 제외한 본당을 중수하고 삼문을 1동의 대문으로 수선했다.

현재 본당과 대문이 있다. 본당은 전면 3, 측면 2칸 맞배지붕이고, 대문은 1동으로 팔작지붕이다. 대문에는 양사재(揚思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과거에는 본당이 전면 3칸과 측면 3칸이었고, 강당과 고직사가 있었다.

지산사 안쪽에는 목련나무와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고, 바깥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최치원과 최익현의 상향 축문(常享祝文)과 진영 봉안문(眞影奉安文)이 전한다.

지산사
지산사

 

개고개 전설

옛날 순창읍에 어느 부부가 어린아이와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장인 회갑을 맞이한 부부는 적성면에 있는 처갓집을 가게 되었다. 개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어 결국 개를 데리고 처갓집을 가기로 했다.

순창읍을 출발해 적성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개 하나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고개를 넘어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게 되었다. 남편은 자식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강도와 싸움을 벌였다. 강도는 손에 칼을 들고 있었고 남편은 맨몸이었다. 강도와 남편의 싸움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한동안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움을 벌였는데, 그 통에 강도가 칼을 놓쳤지만 힘 좋은 강도는 남편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남편의 배 위에 올라타게 되었다.

그러고는 부인에게 "너 이년 안 죽으려면 저 칼을 빨리 가져 오너라"라고 하였다. 부인은 죽인다는 말에 겁을 먹고 벌벌 떨며 차마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발로 칼을 차서 강도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 칼이 강도의 손에 닿을락말락하였다. 강도가 칼을 잡으려 몸을 쭉 뻗었는데 그 순간 개가 달려들어 강도의 목을 물어버렸다. 강도는 칼을 휘둘러 개를 찔렀고, 개는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그리고 개에게 목이 물린 강도도 잠시 후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그 후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처갓집으로 갔다. 처갓집 마당에서 장인의 회갑연을 잘 치르고 나서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남편은 장인에게 물었다. “예를 들어 이러이러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인어른이 그런 여자를 어떻게 데리고 사느냐. 당장 쫓아 버려야지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바로 어제 장인의 딸이 그렇게 했소이다하였다. 장인이나 식구들은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은 처갓집에 부인을 남겨 두고 홀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는데, 개의 행동이 고마웠던 남편은 그곳에 개를 위한 비를 세워 주고 그 비를 '견두비(犬頭碑)'라 하였다. 사람들은 그 후 이 고개를 '개고개'라고 불렀다.

개고개는 인계면 지산리와 노동리 경계다. 해발 140m 개고개에는 순창~남원을 잇는 국도 24호선이 지난다.

 

몰무덤과 목화씨 전설

가목마을 남쪽 골짜기에 몰무덤 명밭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고려 말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붓통에 숨겨 와 재배했다고 전하는 목화씨를 전국에 보급하고자 말에 싣고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곳 가목마을에 도착했을 때 말과 함께 이곳에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 말과 함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묘지 주변에 목화가 자라기 시작했고 주민들에 의해 목화가 번성하게 되었다. 이 말무덤을 몰무덤, 목화가 나서 자란 밭을 명밭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경지 정리로 주변 일대가 논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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