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역사(31)백제 마지막 날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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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역사(31)백제 마지막 날의 진실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1.12.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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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07, 신라와 당 연합군의 기습적 침략으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진 나라 백제. 삼국사기에서 따르면, 백제는 의자왕이 향락에 빠져 충신들을 옥에 가두고 간신들과 어울리다가 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삼국사기에 자주 보이는 유교적 교훈이자, 망국(亡國) 관련 상투적 서술일 뿐이다. 전성기에 근면 성실한 왕이 통치했음에도 전쟁이나 기근, 자연재해 등으로 멸망한 나라도 많다. 백제 멸망과 관련된 진실을 살펴보자.

 

의자왕 백제 마지막 중흥군주

 

우리는 의자왕을 삼천궁녀나 끼고 놀다가 망한 왕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는 백제 멸망 후에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의 본 모습은 그렇지 않다. 무왕(서동)의 큰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용맹스럽고, 결단력이 있는데다 효성도 지극해 당나라에서도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641, 40이 넘은 나이에 백제 31대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백제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열정적인 확장정책을 이어갔다. 이듬해인 6427,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서 낙동강 서편 40여 성을 획득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8월에는 장군 윤충에게 대야성을 치게 하여 함락시켰다. 이로써 신라가 가야를 합병해 얻었던 옛 6가야 영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신라를 거의 멸망 직전 상태까지 몰고 갔다.

 

김춘추의 복수심과 나당동맹

 

6428월 백제군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될 때 성주 김품석과 그 부인 고타소(古陀炤)가 자살한다. 고타소는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의 딸이었다.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백제 멸망에 남은 인생을 걸게 된다.

김춘추는 외국군을 빌려 백제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왜국(倭國) 방문 모두 소득이 없었다. 김춘추는 두 번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648(진덕여왕 2)년에는 당나라로 향했다. 3년 전 고구려 정벌 실패로 상심해 있던 당 태종은 기뻐하며 김춘추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12년 후의 나당 연합군토대가 마련된다.

 

나당연합군 침공

 

당과 신라 연합군의 백제 침략이 극비리에, 그리고 신속하게 전개된다. 660526일에 경주를 출발한 신라군 5만 명이 북쪽으로 진군해 경기도 이천에 도착한 것이 618. 당나라 13만 대군이 산둥반도를 출발해 인천 덕적도에 도착한 것은 621일이었다.

백제는 623일쯤에야 나당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고구려가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당군과 먼저 싸우자는 주장과 신라군과 먼저 싸우자는 주장이 대립하고, 의자왕은 결론을 못 내린다. 이 대책회의는 의자왕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의자왕의 주저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백제군 5만 명은 전통적인 5방 방어 체계에 따라 지방에 주둔했다. 당군이 어디로 상륙할지 모르는 상태였고, 동서 양쪽으로 진격하는 나당 연합군의 양동전도 백제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곤란하게 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백전노장 의자왕도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은 전쟁 목표를 백제 멸망에 두었기 때문에 중간 방어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사비성으로 내달리는 전술을 택했다. 나당 연합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의자왕은 당군이 신라군 없이는 섣불리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한다. 지방에 있는 5방군이 사비성으로 집결할 때까지 신라군을 사비성 외곽에 묶어두기만 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의자왕은 계백이 이끄는 5천결사대에게 신라군 저지 임무를 맡긴다.

 

황산벌전투와 사비성 함락

 

계백이 이끄는 5천결사대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다. 지방군이 규합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계백은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진을 친다. 황산벌에서는 79일부터 10일까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5천결사대는 신라 5만 대군에 맞서 죽기를 각오하고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 하지만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공세에 결국 패하게 된다.

황산벌에서 전투가 벌어진 10일 백제 주력군은 사비 남쪽에서 당군과 결전을 벌이지만 1만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다. 11일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하고 12일 사비의 외곽성인 나성이 무너지고 왕궁이 포위당한다. 개전 5일째인 713일 의자왕은 사비 방어전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겨 2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날 밤 사비도성은 나당 연합군에 함락됐다.

 

웅진성에 2차 방어선 구축

 

개전 5일 만에 사비성을 함락했지만 연합군 지휘부는 의자왕을 놓치는 결정적 실패를 했다. 사비성에서 의자왕만 사로잡으면 백제 지방군도 항복하리라 여겼던 전략에 차질을 빚었다. 나당연합군에게 큰 골칫거리는 18만 대군의 식량이었다. 사비성의 백제군 군량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신라에서 오는 보급품은 백제 국경 산성들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도성인 사비성을 목표로 신속히 진군한 탓에 여러 산성에 농성 중인 백제 병력이 건재했고, 이들은 연합군의 보급 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의자왕은 성주 예식과 함께 웅진성에서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의자왕의 전략은 전력이 그대로 보존된 지방군을 활용한 사비성 포위전이었다. 의자왕은 험준한 웅진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지방에서 올라올 지원군 도착을 고대하고 있었다.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시 공산성)은 험준한 벼랑과 백마강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나당 연합군을 방어하기에 적격이었다. 또 예산의 임존성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도 유리한 상황이다. 임존성은 훗날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과 3년 동안 싸울 때 마지막까지 버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당나라군은 고작 사비성 일대, 신라는 대전 일대만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시간은 의자왕 편이었다.

웅진성(공주시 공산성)

 

측근에게 사로잡힌 의자왕

 

그런데 웅진성에서의 항전 5일째인 718, 의자왕은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주들과 함께 항복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항복 직전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구당서신당서에는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식 우장의자래항)”고 기록돼 있다. 특이하게도 두 사서 모두 의자왕이 주체가 아니라 부하인 예식이 주체로 돼 있다.

又將義慈來降’(우장의자래항)을 분석해 보면 ()’, ()항복하다라는 뜻이다. ()자에는 명사 장수라는 의미도 있지만, 동사로서 거느리다’ ‘데리고 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중국 역사학자 바이근싱 산시대학 교수는 여기서 데리고왕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투항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은 웅진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웅진 수비대장이 오히려 왕을 붙잡아 당나라에 항복하려고 했다. 의자왕은 배신한 부하에게 사로잡히자 자결을 시도했다고 기록했다.

 

백제 멸망의 진실

 

1340여 년 만에 백제 멸망의 진실이 드러나는 묘지명이 발견된다.

2007년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당좌위위대장군이라는 직책을 가진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묘지명이었다. 묘비명에 의하면 예식진(禰寔進)614년에 태어나 67258살의 나이로 사망한 백제 웅천(현 충남 공주) 출신이라고 기록돼 있다. 바로 이 예식진이 웅진의 그 대장 예식이다. ‘예식이 당나라에 귀화한 이후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그리고 2010년 봄 시안 남쪽 근교에서 예식의 아들·손자·형의 묘지명이 잇달아 발굴되었다. 특히 예식의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에 有唐受命東討不庭 即引其王歸義于高宗皇帝 由是拜左威衛大將軍封來遠郡開國公이라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당제국의 명을 받아 동쪽(백제)을 토벌할 때 (백제왕이) 조정(사비성)에 있지 않으므로, 그 왕(의자왕)을 끌고 가서 고종황제에게 귀의했다. 이로 말미암아 (예식이) 좌위위대장군에 제수되고, 내원군 개국공에 봉해졌다.”

이 기록은 예인수의 할아버지인 예식이 의자왕을 잡아다가 당군에 끌고 가서 바친 공으로 좌위위대장군의 벼슬을 받고 내원군 개국공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사비성으로 와서 당군에 항복했다는 사실이 예식의 후손 묘지명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의자왕의 허망한 항복에는 이런 하극상이 있었던 것이다. 웅진성 수성 대장 예식진의 반역으로 700여 년 왕조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백제군은 충분히 항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던 웅진성의 의자왕은 믿었던 예식진에게 사로잡혀 항전 5일째인 7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너무 빨리 멸망했기 때문에 고구려도 지원할 시간이 없었다.

82일 사비성으로 끌려온 의자왕과 왕족들은 섬돌 아래에 꿇어 앉아 치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한 후 12000여 명 백성들과 함께 당군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111일 낙양에 도착한 의자왕은 다시 한 번 당 고종에게 포로로 바쳐지는 수모를 당했다. 의자왕은 망국의 책임을 모두 안고 사면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죽고,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

예식진 묘지명 개석 탁본

 

삼천궁녀는 허구

 

낙화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이다.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자살해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삼천궁녀는 사서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에도 삼천궁녀 이야기는 없다. 백제가 멸망하고도 1000년이 다 된 조선 중기 시인 민제인의 <백마강부>란 시에 문학적인 수식어로 처음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 대중가요 <낙화삼천>(1941)·<백마강>(1954) 등에 삼천궁녀가 언급되며 백제 망국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각인되기 시작한다. 삼천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소설은 윤승한이 지은 김유신(야담사, 1941)이고, 최초의 공식 기록은 이홍직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낙화암조항이다.

백제보다 강역과 인구수가 3배 이상이나 되었던 조선시대 영조 때도 궁녀는 700명을 넘지 못했다. 삼천궁녀는 후대에 조작된 망국의 산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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