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호랑이는 가죽만 남기지 않았다
상태바
[특집] 호랑이는 가죽만 남기지 않았다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1.05 08: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수의 제왕

동물백과사전에 따르면 대형 수컷 호랑이는 몸길이가 4미터이며 몸무게는 300킬로그램이 넘는다. 목덜미를 물어 한순간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민첩성과 집중력, 뛰어난 관찰력과 신중함. 게다가 온 산을 뒤흔드는 듯한 포효와 샛노란 빛을 내뿜는 노란 눈동자는 모든 생명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호랑이라는 말은 한자어 호랑’(虎狼)에 접미사 를 더해 마치 고유어처럼 변한 말이다. 여기서 ’()은 늑대 혹은 이리를 의미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호랑이란 호(·Tiger)와 랑(·Wolf)의 복합어인 셈이다. 정확한 우리말은 이다. 다만, 통상 이라고 할 때에는 표범(·)’까지 함께 일컫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갈범또는 칡범이라고도 한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원동력

호랑이의 용맹한 기상은 우리 민족이 처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정신적 에너지로 강조되기도 했다. 육당 최남선은 잡지 소년(1908.12) 창간호 표지에 <근역강산 맹호기상도>를 그려 한반도 모습을 네 발톱을 곤두세운 채 대륙을 호령하는 호랑이로 표현했다. 한반도 모습을 연약한 토끼 형상으로 표현했던 일제의 의도적 폄하에 대한 반박이었으며, 조선 소년들에게 웅혼한 기질을 일깨워 주고자 함이었다.

육당은 1926동아일보<조선역사 및 민속사상의 호랑이, 건국 초두 이래 영원조선의 표상>이라는 글도 연재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는 호담국(虎談國)”이라며 세계에서 호랑이 이야기가 제일 많은 나라로서, 호랑이 이야기로만 천일야화데카메론같은 책을 꾸밀 수 있다고 평했다.

근역강산 맹호기상도 (출처-위키백과)

 

에도시대 일본문화 속 호랑이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정군에게 호랑이 고기를 보내라고 명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경쟁적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그 가운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의 활약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냉장기술이 전무했던 16세기말 왜병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조선 호랑이들은 소금에 절여져 배편으로 일본에 갔다.

임진왜란 때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는 100여 년 동안 그들 영지 안에서만 무용담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 호랑이 사냥 기사가 기록되기 시작한다. 다음은 최경국 교수(명지대 일문학과)<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무사 그림과 호랑이 사냥>이라는 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우키요에(1720세기 초 일본 풍속화) 화가들이 막부 말기부터 호랑이를 제압하는 무사 그림을 그렸다. 대중들이 맹수의 제왕 호랑이를 제압한 무사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1739년의 상산기담에 가토의 호랑이 퇴치담이 처음으로 수록되고, 이후 에도시대 말기부터 명치시대 초기까지 크게 유행한다.

일본은 야생 호랑이가 없는 나라다. 일본에서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한반도나 한국인을 상징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면 가토의 호랑이 사냥은 한반도 침략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즈음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고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 하는 일본의 행보와 궤를 같이 한다. 한반도 침략을 상징하는 호랑이 사냥이 이 시기에 확대 재생산되는 일은 에도시대 말기부터 싹튼 일본 민족주의 내지 패권주의의 일환이었다.

 

야마모토의 호랑이 사냥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벼락부자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가토를 본받는다면서 조선호랑이 사냥행사를 개최한다. 사냥단 이름도 호랑이를 정복한다정호군(征虎軍)’이라 했다. 191711월 한 달 동안 150여 명을 동원해 사냥 여행을 다녔다. 조선의 최고 포수 21명과 일본인 포수 3명이 가담해 8개조로 나뉘어 함경남북도와 금강산, 전라남도에서 사냥을 벌인다. 호랑이 2마리·표범 2마리·1마리·멧돼지 3마리·늑대 1마리·산양 5마리·노루 9마리 등을 잡았다.

야마모토는 잡은 수확물로 경성과 도쿄에서 한 번씩 연회를 열었다. 만찬 요리는 함경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북청 산양볶음·고원 멧돼지 구이 등이었다. 각 언론은 이번 사냥은 대성공이라고 보도했고, 야마모토는 으스대며 다녔다. 야마모토는 호랑이 두 마리의 고기는 다 먹어 치웠으나, 모피 등 다른 잔해는 모교인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다.

 

해수구제책과 호랑이 멸종

조선총독부는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을 잡아 없앤다는 의미의 해수(害獸)구제정책을 시행했다. 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연표를 보면, 1919년부터 23년간 포획되거나 죽은 호랑이는 97마리, 표범은 624마리인 것으로 나온다. 늑대의 경우 19331942년까지만 무려 1141마리가 잡혔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실제 수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 통계연감을 보면 1924년부터 9년 동안 호랑이 사냥건수는 단 2건이다. 이후 1934(1마리)-1937(3마리)-1938(1마리)-1940(1마리)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기록에서 사라지고 만다.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사냥 탓으로 한국호랑이는 이렇게 멸종 직전에 이른다.

해수구제책 명목으로 죽은 호랑이는 일본 왕족과 귀족에게 진상되었다. 연회에서 호랑이 고기를 먹고 거실에는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를 깔았다. 뼈는 진귀한 약재로 사용했다.

북한 지역에서의 마지막 포획 기록은 19871224일 자강도 화평군 양계리 오가산에서 포획된 수컷 범이고, 남한의 경우 6.25전쟁이 터지고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된다.

 

가죽만 남기는 줄 알았더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사실 호랑이가 남기는 것은 가죽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우에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호랑이 뼈와 피··고기는 최고급 정력 장강제로 생각했다. 호랑이 뼛가루와 골즙은 호정(虎精)으로 일컬어졌는데, 이것을 섞어 만든 독한 술은 호정주라 해서 고가로 팔렸다. 호랑이 가죽은 고관대작들의 융단으로 사용됐다.

다음은 1966년과 1982년에 보도된 언론 기사 내용이다.

지난 3일 안락사한 창경원 벵골 암호랑이의 살코기(40)가 홍기원(49·상업·서울 종로구 계동)씨에게 2700원에 팔렸다. 6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한 근에 500원 꼴로 호랑이 고기를 산 홍씨는 낙찰되자 바로 창경원 광장에 모인 100여 명 수요자에게 한 근에 960원씩, 30분 만에 모두 팔아 18000원 정도의 이익을 보았다.” - <중앙일보> 196635일 기사

지난7일 노환으로 숨진 창경원 호랑이의 고기가 17일 하오 창경원사무실에서 열린 경매에서 근당 33000원 꼴인 400만 원에 팔렸다. 공개입찰에서 120(75)가량의 20년 된 이 뱅골산 수놈 호랑이 고기를 두고 11명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약재상을 하는 조남복씨(44 ·서울 동작구 본동292)에게 낙찰된 것.” -<중앙일보> 19821218일 기사

 

박정희와 호랑이 가죽

월간 중앙200811월호에 실린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사진에 호랑이 가죽이 보인다. 박정희가 애용한 호랑이 가죽 사진은 국가기록원에도 있다. 5·16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신년 하례식에서 박정희 부부는 호랑이가죽 위에서 인사를 받고 있다. 196312175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호랑이가죽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 찍은 사진도 있다. 1966년 신년 하례회 사진에도 호랑이 가죽이 나온다.

그런데 맹수의 제왕 호랑이는 인간 제왕의 만수무강을 도와주지 않았나 보다. 호랑이 고기를 먹은 히데요시는 변변한 후계자 없이 병사했고, 호랑이 가죽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정희도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후계자 없이 급사한다. 두 사람 모두 62살에 죽었다.

 

창경원·사직공원 동물원

우리가 호랑이를 비롯한 야생 동물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동물원 덕분이다. 그런데 근대 동물원의 탄생은 제국주의적 약탈의 역사와 잇닿아 있다.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동물을 잡아온다는 사실 자체가 머나먼 이국땅을 정복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시절이었다. 19세기 후반 세계 최대 동물상이었던 독일의 칼 하겐베크의 경우 “20년 동안 사자 1000 마리, 호랑이 300~400마리, 표범 600~700마리, 1000 마리, 하이에나 800마리를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은 창경원이다. 1909년 일제는 창경궁내 왕실 건물 60여 채를 헐어내고 궁궐 전각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명정전 앞뒤로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설치했다. 사람들은 궁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신기함과 희귀한 동물을 본다는 호기심에 매료돼 창경원을 찾았다. 존엄한 궁궐에 동물원을 들이자는 발상을 한 것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하지만 정작 그는 개원식 닷새 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숨져 그 완성을 보지 못했다. 창경원 동물원은 지난 1984년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했다.

광주지역에서는 사직공원 내 동물원이 1969년 개장했다. 개장과 함께 들어 온 1970, 1971년생인 벵골산 호랑이 부부는 2년 만인 1973년 세 마리의 새끼를 낳은 뒤 7회에 걸쳐 총 24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당시 동양 신기록이었다고 한다. 광주시는 1991년 사직단을 복원하고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동물원을 우치공원으로 옮겼다.

사직동물원 개원 당시(출처-광주매일신문)

 

어린 시절 먹어본 호랑이고기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69, 당시 살던 집이 순화리 군수관사 앞집이었다. 어느 날 오후 군수 부인이 갈비탕처럼 보이는 음식을 대접에 담아 왔다. 국물엔 고기기름이 둥둥 떠 있고, 큼지막한 고기 세 덩어리가 있었다. 군수 사모님이 필자 어머니에게 사모님, 이거 호랑이고기인데 좀 드셔보세요하면서 덧붙인 설명은 이러했다.

사직공원 동물원 개장에 맞춰 창경원동물원에서 호랑이 한 마리를 운반하는 중이었단다. 전주·임실을 지나 순창읍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잠금장치가 부실했는지 그만 호랑이가 탈출해버린 것이다. 아마 새끼를 갓 벗어난 크기의 호랑이였던 것 같은데 도저히 생포가 불가능하자 운반 담당자들이 호랑이를 추격해 차로 들이받아 즉사시켰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동물복지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때였고, 다행히(?)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아 쉬쉬하며 호랑이 고기 일부가 군수에게도 진상된 것 같다. 덕분에 나는 호랑이고기를 먹는 호사(?)를 누렸다. 약간 노린내가 났고, 맛은 소고기 삶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
  • 순창군청 여자 소프트테니스팀 ‘리코’, 회장기 단식 우승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