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용]도시에서 미안한 일, 시골에선 감사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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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용]도시에서 미안한 일, 시골에선 감사한 일
  • 이송용
  • 승인 2022.01.1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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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용(구림 금상)

도시에선 더 이상 못 살겠다!”

다섯째가 태어나면서 내린 우리 부부의 결론이었다.

우리 가정의 첫째·둘째·셋째는 딸이다. 넷째로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들은 달라도 정말 너무 달랐다. 두 발자국만 가도 뛰어가는 것이었다. '얘는 태어나면서부터 뜀박질이 기본 옵션으로 내장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다섯째가 태어났다. 다시 아들이었다. 이젠 두 사내아이가 뛰어다니는데, 그걸 자제시키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시 우리 가족은 광주의 어느 다세대주택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아래는 주인집이었다. 집주인은 점잖으신 어르신이었고, 층간소음과 관련해서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불편하단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우리도 그만큼 조심 또 조심하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늘 아랫집에 죄송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다.

저희 애들이 너무 뛰죠? 혹시 불편하진 않으세요? 너무 죄송해요.”

어르신을 뵐 때다 죄인 된 심정인 우리 부부였다. 어르신은 대개 괜찮다며 웃고 마셨지만, 가끔은 이렇게 답하시기도 했다.

나는 괜찮은디, 우리 딸이 좀 예민해서.”

, 그 댁에 아직 시집 안 간 딸이 있었지. 어르신은 그렇다 쳐도, 그 따님은 또 무슨 죄가 있어 그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이사를 가야 하나? 그럼 또 우리 아랫집에 살게 되는 사람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도시에선, 우리 가족이 어디에 살든 민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게 이타적인 생각만으로 시골살이를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집이 좁은 건지 애들이 많아진 건지 암튼 공간이 부족했다. 집세가 비싼 건지 아빠가 무능력한 건지 현실적으로 더 큰 집을 찾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던 차에 층간소음에 대한 미안함이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된 건 아닐까?

우리 부부는 광주 외곽의 집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담양과 장성 쪽을 알아봤다. 그러면서 우리처럼 도시에 살던 사람이 귀농 또는 귀촌을 하면 집을 구하거나 집을 고칠 때에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일정 부분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시골살이가 좀 더 현실적인 사안으로 다가왔다. 여러 이유로 장성과 담양에서는 우리에게 맞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우리에게 순창을 말했다. 약간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순창이 우리에게로 온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순창의 귀농귀촌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연락을 했을 때,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하나라도 더 도와주려 하신다는 느낌이랄까(참고로 이 글은 뒷광고나 협찬광고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려 드린다.)

처음에 나는 폐가를 구해 손수 고쳐가며 사는 일을 생각했다. 그게 우리의 경제 상황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보다 현실 감각이 있는 아내는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우리가 살만한 집이 구해질 리 없다는 생각을 가진 터였다. 귀농귀촌센터에서 두어 군데 빈 집들을 소개 받고 고민을 이어가던 중에, 아내가 직접 귀농귀촌센터 홈페이지에서 빈 집 한 군데를 물어 왔다. 이내 우리 온 가족은 그 집으로 향했다.

광주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순창 요금소에 들어설 때까지는 괜찮았다. 순창읍을 통과하여 복실리와 인계면을 지나 구림면으로 향하는 그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면서는 , 이거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하나 넘어 구림면에 들어서서도 자동항법장치(내비게이션)는 우리를 알 수 없는 시골길로, 더 깊은 시골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드는 생각은 , 이건 아닌 것 같은데였다.

우리는 금상마을에 다다랐다. 구림면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마을 바로 뒤에는 사실재 터널이 있는데 거기를 통과하면 곧 정읍이니 말이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 회관이 있었고 바로 그 뒤가 우리가 보러 온 집이었다.

크지는 않지만 예쁜 벽돌로 지어진 오래 된 이층집이었다. 6년간 비어 있었던 집이라 했다. 집 안에 멋진 나무 계단도 있고, 옥상도 있고, 마당도 있고, 텃밭도 있었다. 딱 한 가지만 없었다. 그 집을 살 만 한 돈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 집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 했지만,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가 해외에 나가 8년 반 동안 봉사·선교 활동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그새 우리 부부는 자식 부자가 되어 있었지만, 돈 부자는 아니었다. 결혼 13년차에 전세금 천만 원이 우리가 가진 재정의 전부였다.

그날 우리 일곱 식구는 나무 계단에 쪼르르 앉았다. 우리의 작고도 큰 소망을 담아 기도했다.

당신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 이 집을 저희에게 주지 않으시겠어요?’

나는 귀농귀촌 교육을 열심히 받았다. 농협은 저리에 대출을 알아봐 주었다. 서울에 살며 고향집을 팔러 내놓았던 집주인은 좋은 마음으로 집값을 어느 정도 맞춰 주셨다. 우리 가족은 금상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시골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만이 아니라 마당에서도 맘껏 뛰어 다닌다. 마을 골목까지 그네들 차지다. 층간소음 걱정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 가끔 아내와 나는 이구동성으로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애들이 뛰어다니니, 정말 감사하네.”

미안한 일이 감사한 일로 변했다. 우리 부부는 순창에서 낳은 막내()까지 6남매와 함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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