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 역사(32)궁예, 희대의 폭군인가? 난세의 혁명적 지도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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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 역사(32)궁예, 희대의 폭군인가? 난세의 혁명적 지도자인가?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1.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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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패자의 경우, 그 기록은 상당 부분 왜곡돼 기록되기 마련이다. 신라에 패한 고구려 연개소문과 백제 의자왕의 경우가 대표적 예다. 그래도 두 사람의 경우는 당대 중국·일본 사서 등에 소략의 기록이라도 남아 있다.

승자 쪽 기록만 남을 경우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를, 고려의 실질적 창립자인 궁예에 대한 후대 서술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자신을 발탁해준 궁예를 제거해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태조 왕건의 왕조 신하였던 사가들이 그려놓은 궁예의 이미지는 태생적 악인이자 폭군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고려의 실질적 건국자

 

궁예는 신라 왕의 서자로 태어났다(아버지가 헌안왕인지 경문왕인지 확실하지 않다). 일관(주술 담당 관료)의 권유로 왕실에서 죽이려 함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죽임을 피하는 과정에서 애꾸눈이가 되었다.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어느 날 재()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 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이때부터 자신이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

891년 절을 뛰쳐나와 가사를 입은 채 반()신라 대열에 나서게 된다. 죽주(현 경기도 안성시)의 초적(草賊) 세력 기훤(箕萱) 밑에 잠시 있다가, 북원(현 강원도 원주시)의 양길(梁吉) 부하로 있으면서 2년 만에 치악산 석남사와 영원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영월·평창·울진 등 강원도 남부 일대를 복속시켰다.

894년 궁예는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릉에 들어갔는데, 토호 김순식의 도움으로 3500명 대군으로 거듭나 장군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의 평등사상에 깊이 감동받은 농민군들이 앞 다투어 그의 부대로 합류할 정도였다. 삼국사기궁예가 사졸들과 즐거움과 괴로움, 힘듦과 편안함을 함께하고 사사로움 없이 상벌을 공정히 하여 부하들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에 추대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대부분의 기록이 궁예에 대해 왜곡·폄하하고 있지만 이 부분만은 그렇지 않다.

895~896년 인제·화천·금성·김화 지역을 아우르고 단숨에 철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군세가 커지자 황해도·평안도 호족들과 왕건 부자가 귀부하여 군사력과 경제력은 더욱 커졌다. 이를 기반으로 898년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부 남한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된 궁예는 901년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철원 천도, 마진·태봉국 선포

 

대제국 건설을 꿈꾸던 궁예는 904년 철원 북방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청주 지역민 1000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지었다. 이 무렵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905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911년에는 태봉국(泰封國)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도읍지는 수로를 이용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운반하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철원은 그럴만한 수로가 없다. 그런데도 궁예는 철원으로 천도를 강행했다. 왕건이 장악하고 있는 송악에서 왕권 강화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철원군 홍원리에 위치한 '궁예도성'(출처 연합뉴스)
철원군 홍원리에 위치한 '궁예도성'(출처 연합뉴스)

 

 

민심 이반

 

궁예는 고구려 유민이 많은 송악에 도읍을 정할 때까지만 해도 국호를 고려라 하여 옛 고구려 땅 회복과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새 나라를 건설할 뜻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다시 태봉으로 바꾸면서 건국 정체성을 의심받게 된다. 자연적으로 고구려 유민 중심으로 반궁예적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고, 패서(浿西) 지역 고구려 유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왕건에게 힘이 쏠리기 시작한다.

궁예는 호족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처했다.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반대 세력 탄압을 위해 미륵불과 미륵관심법을 활용했다. 왕건에게 모반을 음모했다며 추궁할 때도 미륵관심법을 내세웠다. 스스로 미륵불의 화신이라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승려 석총과 왕비 살해한 이유

 

궁예는 불교에 대한 식견이 남달랐다. 불경을 재해석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있어 20여권의 경전을 지어 자주 강론했다고 한다. 불교국가였던 신라 왕들 중에도 불교적 저술을 직접 남겼다는 이는 없었다.

삼국사기열전에 궁예가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며 자신의 불경(佛經)으로 강설(講說)하자 진표율사(8세기)의 계승자 석총(釋聰)이 이를 사설괴담(邪說怪談)이라고 비난했다가 격노한 궁예에게 철퇴로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예는 진표나 석충처럼 법상종에 속했음에도 그 계통을 달리했다. 진표와 석총의 불교는 미륵과 지장보살 신앙을 중심으로 한데 비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아미타보살과 관음보살을 의미하는 이름(신광보살·청광보살)을 지은 궁예의 불교는 미륵과 아미타, 관음 중심이었다. 삼국유사에서 석충이 왕건과 내통했던 인물로 묘사되는 점까지 감안하면 석총 살해에는 왕건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궁예가 부인과 아들 둘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충격적이다. 하지만 왕비 강씨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왕건과 결탁한 호족 집안의 딸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런 평가는 달라진다. 단순한 왕비 살해가 아니라 호족과 왕권 사이의 권력 다툼의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미륵사상

 

불교는 삼국시대에 도입된 이래 국가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왕이 부처라는 왕즉불사상은 신라 왕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다. 진평왕은 자신을 석가불, 부모를 석가의 부모인 백정과 마야부인이라고 했다.

당나라 여황인 측천무후(則天武后)도 중국사 유일한 여황제가 됐을 때 궁예와 비슷한 모양으로 전륜성왕을 자칭하고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설을 퍼뜨려 일체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인 자신의 즉위를 합리화하려 한 것이다.

궁예의 미륵관심법이 남을 학대하는 데만 이용되었다면 어떻게 민심을 모아 후삼국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궁예의 미륵관심법은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신정정치의 한 표현이었다.

궁예 불교는 하층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궁예 주변 인물들 중에는 내원(궁중 사원) 허월, 소판 종간, 내군장군 은부 등 어려서부터 절에 기식할 수밖에 없었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현실 정치와 궁예 미륵사상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하층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미륵불은 미래불로서 현실적 조건이 좋지 않을 때 등장했다. 신라 말기 진골 귀족 정권의 혹독한 가렴주구로 새 시대를 열망했던 민초들에게 유교적 도덕주의보다는 군주가 종교적 구세까지 약속해주는 불교적 종교국가가 더 가까이 와 닿았을 것이다.

 

사서에 기록된 궁예의 마지막

 

궁예는 송악을 근거로 하는 패서(浿西) 세력의 수장 왕건 세력의 반란으로 918년 왕위에서 쫓겨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이 어찌할 줄 모르다가 미천한 차림으로 산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안가서 부양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사에는 궁예는 산골로 도망했으나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가 바로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승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궁예의 죽음을 비참하고 부끄럽게 그려야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한 나라의 제왕이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했으며, 고려사는 한술 더 떠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부정적으로 각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예도성 석등은 일제 때 국보로 지정됐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궁예도성 석등은 일제 때 국보로 지정됐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궁예 왕에 대한 전설

 

기록물은 승자 위주로 서술되어 전하지만, 패자의 모습은 설화의 형태로, 산이나 강의 이름으로 후세에 남아있기도 한다. 폭군과 패륜으로 낙인찍힌 궁예는 철원 일대에서 수많은 전설로, 그리고 명성산 울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궁예에 대한 전설은 육당 최남선이 먼저 기록했다. 1924104, 최남선은 금강산 가는 길에 경원선 삼방역 근처에 있는 한 서낭당을 찾아갔다. 궁예를 서낭신으로 모시는 서낭당이었다. 궁예왕은 죽어서도 삼방지역의 화복을 지배하는 신()으로 받들어진다. 여기서 궁예가 구레왕, 즉 고려(고구려)왕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최남선은 그 서낭당을 안내한 사람으로부터 궁예의 최후에 대해 듣고 풍악기유를 남겼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이다.

강원도 세포군 세포읍(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삼방산(三房山) 삼봉까지 홀로 쫓겨 온 궁예는 한 중을 만나 후일을 도모할 방도에 대해 묻는다. 중이 어리석다 말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궁예는 왕건에 대한 배신감으로 상심하고 분노해 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산 아래 물을 향해 몸을 던진다. 그러나 궁예는 물에 빠지지 않고 산기슭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우뚝 선 채로 죽은 궁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누이려 해도 시신이 꿈쩍하지 않았기에 금으로 관을 만들어 시신 위에 씌운 후 위에 큰 돌을 놓았다.

그 후 도적들이 금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돌을 걷어 내다 하늘과 땅이 요동치자 도망을 가는 일이 있었다. 또 말을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굽이 땅에 붙어 못 지나가다 말에서 내려서 걷자 겨우 말굽이 떨어졌다고도 한다. 이후로 궁예의 무덤 앞은 누구든지 말을 타고 지날 수 없었다고 한다.”

 

궁예에 대한 평가

 

궁예 연구자인 슬픈 궁예의 저자 이재범 경기대 교수는 궁예의 포악함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사서에 기록됐지만 실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조직적인 결탁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궁예는 신라말 혼란기를 이끈 혁명적 지도자였나? 아니면 희대의 폭군이었나? 궁예 부하들이 왕건에게 쫓겨난 게 서러워 울었다는 명성산(鳴聲山)과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을 보개산성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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