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역사(33)​​​ ‘묘청의 난’과 정지상, 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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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역사(33)​​​ ‘묘청의 난’과 정지상, 김부식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2.1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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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초 고려는 위기국면에 놓여 있었다. 1126(인종4) 고려 17대 인종(仁宗)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李資謙)이 최고 권력자 행세를 하며 왕위를 엿보다가 처형되었다. 이 무렵 국제정세도 요동쳤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나라를 장강(長江) 이남으로 몰아내고, 고려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이자겸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운 이들이 바로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이다. 이 일로 개경파 김부식의 권력은 좀 더 강해졌고 정지상이 중심인 서경파의 힘 또한 더욱 강력해졌다. 이제 정치구도는 묘청·백수한·정지상의 서경파와 개경·동경(경주)의 후원 세력을 뒤에 업은 김부식 세력의 대결구도가 되었다.

 

묘청과 서경천도론

묘청은 바로 이때 등장했다. 1127년 인종에게 기용된 묘청은 왕의 신임을 받으며 중앙정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금이 고려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김부식 등은 사대의 입장을 취한 반면, 묘청·정지상 등은 금을 정벌하고, 풍수지리에 기반해 기운이 쇠한 개경(개성)을 떠나 옛 고구려 도읍이자 왕기(王氣)가 왕성한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다. 이른바 서경천도설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임금을 황제로 칭하고 독립적인 연호(年號)를 세우자는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건의했다.

개경 기득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묘청을 지지했고, 인종의 마음도 기울었다. 인종은 서경에 새로 지은 대화궁(大花宮)에 가서 개혁책을 발표하고, 계속 그곳에 머물며 정지상의 강론을 들었다.

그러나 서경 천도는 선뜻 이행되지 못했다. 김부식 등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 도읍지를 건설하면 백성이 과도한 노역에 시달리고 막대한 경비가 든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또한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 송을 공격해 황제를 포로로 잡을 만큼 강대한 상황에서 금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묘청은 조바심이 났다. “서경에 궁궐을 세워 천도하고 고려가 황제국을 칭하면 자연히 천하를 아우르게 되어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주변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그래도 자신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자 속임수를 썼다. 대동강 물속에 기름을 넣은 떡을 가라앉혀, 멀리서 보기에는 물 위에 뜬 기름 때문에 오색 빛깔이 서리게 하였다. 그런 뒤 왕에게 신룡이 침을 토해 오색구름을 만들었으니 금을 제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속임수는 곧 발각되고, 묘청에 대한 왕과 사람들의 신뢰는 크게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묘청의 급조된 반란

조정에서 세력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묘청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1135년 묘청·조광·유담 등이 주동이 되어 서경에서 군사를 모아 국호를 대위, 연호는 천개 그리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부르며 칭제건원, 북벌 등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다.

인종은 곧바로 서경토벌군을 출전 시켰다. 김부식이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원수로 임명되어 관군을 지휘했다. 그는 서경으로 떠나기 전 개경에 남아있던 정지상·김안·백수한 등을 잡아 곧바로 처형했다. 관군은 서경을 포위해 12개월 만에 서경을 장악하고 있던 묘청 잔당을 모조리 소탕했다.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 김부식의 동경파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고려 건국 이래 계속되어온 고구려 계승주의와 신라 계승주의 대결에서 신라 계승주의가 최종 승리한 것이다.

 

신채호의 평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역사가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에서 우리나라 종교·학술·정치·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고 하면서,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1000년래 제1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묘청의 난은 낭가·불교사상 대 유가사상’, ‘국풍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한 판 전쟁이며, 전자의 대표자가 묘청이며 후자의 대표자가 김부식이라고 했다. 그는 김부식의 행위야 말로 그 어느 전란보다도 우리 역사를 단절·왜곡시키는 데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독립 대 사대의 싸움에서 묘청이 졌기 때문에 조선 역사가 고구려의 기상을 잃어버리고 1000년간 사대(事大)로 이어져오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탄식했다.

 

천재시인 정지상

정지상은 신라말기 최치원 이후 고려 전기 한시문학을 주도했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지상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해 시를 잘 짓기로 유명했다. 야사에 보면 5살 때, 대동강에서 노니는 오리를 보고 누가 흰 붓을 들어 강물 위에 을()자를 써놓았을까?”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한시 중 이별 주제 최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시 <송인>(送人)도 과거에 합격하기 전 청년시절에 지은 것이다.

비 개인 긴 언덕에 풀빛이 짙어 가는데(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르네(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다 마를까(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데(別淚年年添綠波)

정지상의 <송인>이 걸려 있던 평양 부벽루

 

정지상의 억울한 죽음

정지상은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까지는 묘청과 노선이 같았지만 반란에는 동의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도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김부식은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출정에 앞서 묘청과 내통했다며 개경에 있던 정지상의 목부터 베어버렸다.

그러나 연루된 직접적 증거가 없는 점, 거사 당시 그가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 먼저 죽이고 왕에게 사후 보고한 점, 심문 등 법적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 고려사편찬자가 정지상을 반역자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은 점에서 김부식의 사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후까지 이어진 대결

정지상의 시 중에 임궁에서 독경소리 끝나고(琳宮梵語罷·임궁범어파)/ 하늘빛은 유리처럼 맑도다(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라는 구절이 있었다.

김부식은 정지상의 이 시 뒤쪽에 자기 시를 달아 붙이기를 원해 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지상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고 그 후 몇 차례 더 김부식이 부탁했음에도 아예 들은 척도 않았다.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김부식이 이 일에 대단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고려사는 반역자 묘청을 설명하면서 맨 끝에 정지상의 죽음과 관련해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부식과 정지상은 평소 글에서의 명망이 서로 비등했으므로 김부식이 불평을 품고 이때 정지상이 묘청과 내응했다는 구실로 살해했다고 하였다.” 정지상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으로 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립은 정지상이 죽은 후로까지 이어진다. 한 세대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고려 후기의 명문장가 이규보도 그 억울함에 동감했는지 <백운소설>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지상은 김부식의 손에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 어느 날 김부식이 버들빛은 천 가지 푸르고(柳色千絲綠·류색천사록)/ 복사꽃은 일만 점 붉게 피었다(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라고 읊었다. 그러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천 실, 만 점을 누가 일일이 세겠는가? ‘버들은 가지가지 푸르고(柳色絲絲綠·류색사사록), 복사꽃은 점점이 붉게 피었다(桃花點點紅·도화만점홍)’라고 고쳐야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지상은 단 두 글자만 고쳐 완벽한 시를 만들었고, 이 일화는 시를 쓰는 모든 이들에게 일종의 텍스트로 남아 있다.

 

김부식과 삼국사기

1075년 고려 문종 때 태어난 김부식은 신라 무열왕계다. 증조부 김위영이 태조 왕건에게 충성해 경주 지역을 다스리는 호족으로 임명된 이후 그의 집안은 경주에 뿌리내렸다.

김부식은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는 노련한 정치가이자 재상이었다. 그는 문종·예종·인종·의종 등 4명의 군주를 모시고 때로는 권력과 타협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권력을 창출하는데 앞장서는 능동적 정치가의 처세를 보이며 주류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그런데 1140년 김부식의 권력에 이상 기후가 포착된다. 인종이 김부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갈등 관계인 윤언이·한유층을 불러들였다. 그 무렵 형제들이 죽고 측근이었던 정습명이 탄핵 당했다. 오랜 시간 권력 핵심에 있던 김부식은 떠나야 할 시기임을 직감하고 사직상소를 올린다. 인종은 그에게 동덕찬화공신 호를 주고 은퇴를 허락했다. 아울러 삼국사기편찬을 지시했다.

김부식은 최산보·이온문 등 젊은 학자들과 함께 삼국 역사를 기술해 5년 만에 삼국사기50권을 편찬했다.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기록유산이다. 신화나 신비주의, 과장·윤색을 지양하고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쓰였으며, 이후 고려사조선왕조실록편찬 등에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1000년 기록을 담은 삼국사기는 오늘날 우리가 그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첫째 짐과 태자란 호칭 대신 과인과 세자를 사용해 황제국 중국에 머리를 숙이는 등 사대주의적 관점, 둘째 삼국시대를 신라 중심으로 바라보았다는 점, 셋째 삼국시대 이전 역사와 고구려의 북방경영·백제의 요서 경영, 발해 역사를 의도적으로 누락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이어진다.

게다가 김부식을 향한 가장 큰 비난은 그가 삼국사기를 편찬하고 나서 당시 남아있던 상당한 양의 각종 옛 사서를 없애버린 점이다. 만약 그 책들이 남아 있었다면 우리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전혀 다른 역사를 배우고 있을 것이다.

김부식에 대한 논쟁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해 고려 국시인 북진정책을 사실상 중단하게 한 사대주의자라는 점, 이로 인해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이라는 역사적 유산 대신 신라 계승이라는 지역적 한계성을 스스로 부여한 점 등이다.

또한 김부식과 그의 두 아들의 오만이 1470년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난이 발생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는 점도 김부식이 비판받는 한 이유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당시 의종의 내시(요즘의 청와대 비서관)였는데, 하루는 나이 지긋한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웠고 정중부는 김돈중을 심하게 야단쳤다. 김부식은 아들인 김돈중을 꾸짖어야 했지만 거꾸로 의종에게 고해 정중부에게 매질을 하는 등 모욕을 안겼다. 이에 정중부는 원한을 품고 후에 무신난을 일으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김돈시를 모조리 죽였다. 김부식은 부관참시 되는 비극을 당했다.

고려 궁궐 개성 만월대 터(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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