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연의 그림책(18) 가드를 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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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연의 그림책(18) 가드를 올리고
  • 김영연 길거리책방 주인장
  • 승인 2022.03.16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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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른다.

좁은 길을 지나, 골짜기를 넘어

커다란 바위를 지나니 웅덩이,

웅덩이를 넘으니 가파른 언덕

다른 길로 가볼까

조금만 더 가보자

길을 잃었다.

 

글만 읽으면 산에 오르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산에 올라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마음은 청춘이라, 처음엔 단박에 오를 것 같았지만, 어느덧 한 걸음도 못 뗄 것 같은 숨 가쁜 순간이 찾아옵니다. 땀이 비처럼 흐르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때론 커다란 바위를 만나 엉금엉금 기어가야 합니다. 지름길은 없을까? 쉬어갈 순 없을까? 잔꾀를 부려봅니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던 길이지만 결국 고생 끝에 정상에 올라 바람을 느끼게 됩니다. 인생을 등산에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왜 제목이 <가드를 올리고>(고정순 글·그림/만만한 책방/2017)일까요? ‘가드란 복싱에서 상대편의 주먹을 막기 위하여 취하는 팔의 자세를 말하지요. 또한 표지 그림만 보아도 링 위에서 벌어지는 복싱이야기 같아 보입니다. 다만 배경색이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을 떠올리게 하긴 합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다시 바람이 부는 날이 올까

 

표지를 넘겨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복싱하는 장면뿐입니다. ‘빨간 주먹검은 주먹이 시합을 합니다. 빨간 주먹은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두들겨 맞습니다. ! 퍼버벅! 퍼벅! 결국 상대의 거친 공격에 쓰러지고 맙니다. 쓰러진 채로 잠시 생각합니다. 포기할까? (그만 내려갈까?) 여기가 어디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때까지 작가는 시합중인 선수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기분이었던 날들이 있었을 겁니다. 멈추고 싶고, 포기하고 싶었던 그날들.

검은 주먹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 모든 고통과 시련을 나타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아픔도 있고, 시대적인 아픔도 있습니다. 맞고, 쓰러지고, 또 져서, 이번 생은 망했다 싶은.

그동안 우리는 군인에게도 당해 보았고, 사기꾼에게도 당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도 검은 주먹입니다. 지금은 잠시 휘청거렸지만, 다시 상대방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가드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합니다.

 

조금만 더 가자

바람이 불때가지 더 가자

 

50페이지에 걸쳐 오로지 빨간 주먹과 검은 주먹 둘만의 권투 장면만 계속 클로즈업됩니다. 링 밖에서 응원하는 관객도 없이 오로지 둘뿐입니다. 외롭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고지가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지요. 맞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또 맞고 반복이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가드를 올립니다. 이때 비로소 희미하게 미소 띤 빨간 주먹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경기는 공이 울리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작가는 이 책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복싱선수들의 경기를 수도 없이 보았겠지요? 목탄으로 그려진 두 선수의 주먹 다툼은 마치 실제 경기를 보는 느낌으로 지면을 튀어나올 듯, 튕겨 나갈 듯 속도감 있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림을 보는 내내 빨간 주먹의 벅찬 숨소리와 고통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바람이 분다. 가드를 올린다.

아무도 없는 모퉁이에서

다시

가드를 올리고

 

산에 오르는 이야기와 복싱 장면이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절묘하게 겹쳐집니다. 링 위에서 쓰러지는 권투 선수처럼 삶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입니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행위는 단순히 실패와 극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무너지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드를 올리는 행위는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끊임없이 쓰러지는 사람의 이야기인 동시에 스스로 다시 일어서는 사람에게 희망과 믿음을 보여줍니다.

<가드를 올리고>의 빨간 주먹은 작가 고정순의 삶을 닮았습니다. 이십대부터 갖은 고생을 하며 그림을 그려온 시간들, 깊은 병을 얻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일상적인 삶. 그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림책을 선택한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그림책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책은 여러 번 인생의 파고를 만난 어른들에게 주는 이야기였지, 아이들을 위한 건 아니었어요. 실제로 <가드를 올리고>를 이해하고, 감응하는 아이가 있다면 슬플 것 같기도 하고요.” (http://ch.yes24.com/Article/View/42867 예스 24 인터뷰)

살다 보면 한 번쯤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가드를 올리고 여러분은 누구와 싸우고 있나요? 싸울 준비가 되셨나요? 오늘도 쓰러진 당신, 다시 일어서는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

나는, 비둘기(고정순글·그림/만만한 책방/20222)

-다친 비둘기가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

 

옥춘당(고정순 글·그림/길벗어린이/20221)

-(사탕)처럼 예뻤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그린 만화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고정순 글·그림/노란상상/202111)

-환경에서 일하는 청소년 실습노동자와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을 고발하는 그림책

 

무무씨의 달그네(고정순 글·그림/달그림/20216)

- 달로 떠나는 여행객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무무씨는 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무무씨네 구둣방에 들린 이들의 사연을 들어준다. 달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달에 간 그들은 행복을 찾았을까요?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고정순글·그림/만만한책방/202010)

-늙은 산양이 죽음을 직감하고 죽기 딱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나는 귀신(고정순 글·그림/불광출판사/20207)

-한 아이에게 찾아온 귀신아이로 인해 벌어지는 기적 같은 이야기

 

시소: , 너 그리고 우리(고정순 글·그림/길벗어린이/20206)

- 안경 낀 이이가 놀이터에 왔는데 아무도 없다. 혼자 타보는 시소. 혼자 탈 수 없는 시소를 심심해 하고 있는데 마침 여자 아이가 나타난다. “안녕? 나랑 같이 시소 탈래?”

 

아빠는 내가 지켜줄게(고정순 글·그림/웅진주니어/20195)

-시대 아빠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림책

 

철사코끼리(고정순/만만한 책방/201812)

- 코끼리 얌얌이가 죽자 철사를 모아 코끼리를 만들어 끌고 다닌 데헷. 어느 날 멈추어 철사코끼리를 바라본다.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까?

 

엄마 왜 안와(고정순글·그림/웅진주니어/20187)

-홀로 집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린다. 이 시대 일하는 엄마들의 생생한 일상.

 

슈퍼고양이(고정순 글·그림/웅진주니어/20164)

- 동네 사람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고양이를 구출해서 용용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소희. 밥을 너무 많이 먹은 용용이는 커다란 슈퍼고양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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