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근현대사]가인 김병로, ‘합법적인 항일투쟁’ 위해 법률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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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근현대사]가인 김병로, ‘합법적인 항일투쟁’ 위해 법률가 선택
  • 안욱환 누가한의원 원장
  • 승인 2022.03.23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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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장 위대한 법조인으로 손꼽혀

순창과 관련된 근현대사를 하나씩 짚어봅니다. 가인 김병로 선생이나 전봉준 녹두장군처럼 순창과 관련된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 지역이 겪어온 근현대사를 알아봅니다. 순창과 관련된 신문이나 사진 등의 자료를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편집자>

가인 김병로 선생 동상
가인 김병로 선생 동상(전주 덕진공원)

가인 김병로(1887~1965)’ 선생은 순창이 낳은 위대한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입니다. 가인은 녹두장군 전봉준보다 32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군, 김병로 선생은 순창 복흥면이라는 같은 전북에서 태어난 인연이 있습니다. 가인 선생이 만 7세 때인 1894년에 녹두장군이 복흥면과 인접한 쌍치면에서 붙잡히셨으니, 가인은 어려서부터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18세 가인, 73세 면암을 만나다

그런 결과인지 가인 나이 18세인 19065월에 마음으로 존경하던 면암 최익현이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일으킨 의병 운동 소식을 들었던 바로 다음 달, 면암이 의병을 이끌고 순창 용추사로 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면암을 찾아갑니다. 18세 가인이 73세 면암을 만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순창읍에 진주한 면암의 의병 대열에는 가인 집안의 산지기이자 명포수 채상순이 모은 대 여섯 명의 포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의병 세력은 전부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전주와 남원에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진위대가 순창을 포위하자 면암은 만약 왜군이라면 결사적으로 싸우겠으나 진위대라면 이는 우리로서 우리를 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라며 항전 중지를 지시하는 한편 진위대에 대해서도 동족살상을 중지하자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위대는 공격을 해왔습니다. 면암과 같이 있었던 가인은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남원 병영에서 순창에 파송된 병정 약 쉰 명이 () 새벽에 동헌 전면에서 약 2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홀어미산성에 올라 면암이 좌정해 있는 동헌을 향하여 사격을 감행하였으므로, 선생의 비서격인 유생 한 명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탄환이 비 오듯 하며 다수 인민을 살상할 상태였으므로, 선생은 의관을 정제하고 서면을 산성에 보내어 사격을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 병정에 대하여는 응징하지 아니할 것을 통고하고, 모든 의병에게 해산을 명한 후 자기만이 조용히 관군에게 연행되어 남원 병영에 구치되었다.”

이와 같이 의병과 관군의 목숨을 보호한 면암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단식 투쟁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녹두장군·면암·간재에게 받은 영향

한편 가인의 스승 간재 전우도 을사조약의 국치를 당하여 면암처럼 직접 의병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붓으로써 항거했습니다.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내용의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썩은 조정과 설치는 왜놈이 보기 싫다며 외딴 섬으로 떠났습니다.

이처럼 가인은 녹두장군의 영향과 애국의 큰 선비 간재의 가르침 그리고 면암의 의병 투쟁에 참여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민족정기를 밝히고 개혁을 주도한 위대한 지도자를 접했습니다. 이는 가인이 일제강점기에서 항일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변론을 도맡아서 하고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삼권분립의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은 왜 법률을 전공하게 되었을까요. 가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합법적인 항일투쟁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변호사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즉 억울한 국민들을 구해 보자는 의분에서 법률을 전공해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가인은 1910년 만 22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법률 공부를 시작했는데 고학으로 공부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19157월 도쿄를 떠날 때까지 만 6년 동안 학자금 마련을 위해서 두 번이나 귀국을 했습니다. 유학하는 시기를 줄이기 위해 처음에는 대학 입학 전에 청강생으로 등록하고 1학년 전 과목의 대학 강의록을 구해서 자취방에서 3~4개월 동안 독파하는 방법으로 편입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무료변론

1920년 변호사가 된 가인은 1923형사공동연구회를 발족하여 항일 변호사들과 함께 법정에서 독립운동이 무죄라고 주장합니다. 이 연구회는 애국투사들의 무료변론을 할 뿐 아니라 감옥에 있는 투사들에게 사식을 넣어주고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영화 <밀정><암살>에는 명사수로 유명한 실존인물인 김상옥 의사가 나옵니다. 그는 김원봉의 의열단원으로 활약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억압하는 총 본부 역할을 했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포위한 적을 사상케 하고 끝까지 항복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게 민족적 자존심과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분입니다.

일제는 관련자를 구속하고 갖은 고문을 가한 뒤 8명을 기소하였고 가인은 허헌, 김태영, 이승우 변호사와 함께 변호를 맡았습니다. 가인은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며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인데, 이 피고인들은 사실 2000만 조선 민족이 독립사상을 가진 것과 같으므로 무죄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가인을 포함한 항일 변호사들의 활약은 당시 주요 언론에 자세히 보도되어 동족들의 민족정신을 높였습니다.

 

국가 법률 편찬·사법체계 근간 마련

해방된 뒤에도 가인은 해박한 법률 지식으로 신생 국가의 법률을 편찬하고 사법체계의 근간을 세웠습니다. 그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반민특위를 비롯하여 사사건건 사법권을 침해하려 할 때마다 사법부의 엄정한 독립성을 강조함으로써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승만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순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시 임시적인 입법으로 제정 단계부터 곧 폐지될 운명이었던 법입니다. 가인은 19534월 국회 연설에서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 폐지를 제안했습니다. 이미 있는 형법만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국보법을 폐지 목록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국회에서 형법이 제정될 때 국가보안법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자유당은 가인이 대법원장에서 퇴임한 이후,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본 회의에 상정하였고 이에 가인 선생은 언론 기고 및 대담, 논문 등을 통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가인 선생의 삶, 후대에 계속 알려야

가인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사법부 독립에 관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으며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뼈대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 때문에 그의 뒤를 이은 많은 법조인들이 가인을 존경하며 가장 위대한 법조인으로 가인 선생을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순창에 사는 우리도 평생을 민주주의자의 모습으로 살았던 가인 김병로 선생을 본받아서 헌법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앞장 설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가인의 정신을 잊지 않도록 후대에게 계속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진 법조삼성(法曹三聖)상. 왼쪽부터 바오로 김홍섭 선생(김제),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순창), 화강(華岡) 최대교 선생(익산). [위.아래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덕진공원 법조삼성 상|작성자 산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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