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水墨) 정원9-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희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2001년>
장석남(1965~ ) 인천광역시 출생. 시집 <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외 다수
이 시를 읽고 나니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번지고 있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올 봄도 가을을 위하여 번지고 있고, 나는 너에게 가서 번져 내가 되어 있고, 만남도 번져서 이별이 됨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것을 번짐이라는 수식어로 생각해 보니, 어쩐지 소란스러운 세상이 고요함속에 환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 시속에 모든 것들은 정지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고 서로 다가가서 무엇인가 되고자 속삭입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강한 믿음과 힘을 가지고 있고, 자연에 대한 모든 힘을 번짐으로 보고 그 안에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고달픈 세상살이의 정한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출중한 감각으로 쓴 시입니다.
번짐 // 번져야 살지 /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 번짐 //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 <중략>
언어가 세상에 창조된 이래 번지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내가 베풀 친절에 누군가가 즐거워한다면 아 얼마나 아름다운 번짐입니까?
올 봄도 찬란한 가을에 사과 한 알이 되기 위하여, 우리들의 밥 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 번짐이 시작됩니다.
모두 내 알뜰한 내 꿈과 사랑을 위하여 번지는 내 봄을 만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