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14 디오게네스처럼
채광석 시인
분노를 조직하라는 시대감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슬품을 연대하라는 대중감정에
종종 침묵하고야 말았다
이십대의 가난한 미혼 예술가가
쌀이 떨어져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한 마디에
집단 수장된 세월호 아이들의 이야기
어느 자동차 회사 해고 노동자들이
줄줄이 자살했다는 이야기
눈 뜨고 감을 때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죽음의 이야기
그러나 정신과 몸은
쉽게 반응하지 못한다
그런 나를 무감하다고
야단치지 마시라 너의 유감에만 충실하시라
동원되지 않은 내 감정 그 자체와
난 지금 외로운 사투를 하고 있나니
부디 내 눈앞에서 비켜주시게
햇볕 가리네
1968년 순창에서 태어난 채광석 시인은 대학 재학 중인 23세 때 등단했다. ‘대학 재학 중 등단’이라는 수사는 화려함 그 자체다. 하지만 등단은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등과는 화려함의 결이 전혀 다르다. 채광석 시인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에 절필을 한 후, 나이 쉰이 넘은 지난 2019년 2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펴냈다. <오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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