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40) 유등면 건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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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40) 유등면 건곡리
  • 정명조 객원기자
  • 승인 2022.04.2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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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곡·학촌·금판, 건지산 골짜기 산세 강한 건곡리

건곡리(乾谷里)는 유등면에 속하는 법정리이다. 마을이 건지산(乾芝山)(412m)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산은 강하고 물은 약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건실(乾室) 또는 건곡(乾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통상 건곡리라고 하면 건곡리와 학촌리, 금판리를 합해서 부르는 법정리의 명칭이다. 본래 건곡리는 웃건실을 이르는 말이었고, 아랫건실은 학이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 하여 학촌(鶴村), 금판리는 마을 형상이 겸(·집게) 바닥처럼 족집게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쇄판(鎖板쇠판이로 일컫다가 금판리(金板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211031일 기준 인구는 173세대, 303(143, 160)이다. <건곡 74세대·150(69, 81), 학촌 60세대·91(39, 52), 금판 39세대·62(35, 27)>

건곡마을 전경
건곡마을 전경

건곡(乾谷)마을 유래

건곡마을은 삼국시대 때부터 형성된 마을이다. 윗건실 또는 건곡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은 건지산(乾芝山)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마를 건()’골 곡()’자를 붙여 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형국은 선형을 하고 있다. 당산제 지내는 곳이 북쪽 마을 뒤 할아버지 당산(느릅나무), 아래 당산인 할머니 당산, 여금당이라 하는 장군터와 동청 당산 등 네 군데가 있다. 마을 한복판 여근곡(女根谷)에 있는 샘물 통새암은 음용수로 아주 상상을 초월한 좋은 물로 옛날에는 이 물과 이곳의 지형 때문에 발효식품의 제조에 최적이어서 1940년대 초까지 곡자(일명 누룩)라는 술을 빚는 원료를 생산하여 전국에 판매하였다 한다.

 

학촌마을 전경
학촌마을 전경

학촌(鶴村)마을 유래

500여 년 전 터를 잡은 마을로 신건실이라 불렀다. 마을 안에 당산이 있고 당산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당산터가 세다 하여 마을 내 불화가 일어나 연못을 없애버렸다. 학촌이라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풍수설에 뒷산이 학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학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힘이 센 장사들이 많이 태어났고, 음력 정월에는 액운을 몰아내기 위해 집집마다 방문하여 농악을 하였으며, 제초제가 없는 시절 논의 잡초를 손으로 김을 매면서 농요소리를 즐겨 부르는 부자마을이었다.

 

 

금판마을 전경
금판마을 전경

금판(金板)마을 유래

거등산에서 동쪽으로 한 지맥이 내려와 다시 남으로 박환(剝換)하여 학촌 옆산 정금산으로 내려가면서 골짜기를 형성하니 이곳에 장풍향양(藏風向陽·바람이 적정한 남향 풍수) 되었기에 예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농경문화의 적지인 마을이다. 마을 앞산에서 금이 나왔기에 금판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원래는 쇄판이었다. 마을 형상이 겸()바닥으로 족집게처럼 생겼다 하여 자물쇠와 같은 언덕 비탈이란 말로 쇄판(鎖板)이었던 것을 쇠판이라고 해서 금판(金板)으로 기록한 것 같다.

*박환(剝換) : 험한 산세가 밑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일어나고 엎드리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점점 순해지는 데, 풍수지리에서 이런 형상을 뜻하는 표현.

 

옥천부원군 조원길 묘·묘표

고려 후기 순창 출신 충신

본관은 옥천(玉川), 자는 성중(聖中), 호는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1391)1369(공민왕 18)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설장수(偰長壽) 등과 함께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일등 공신이 되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증조할아버지는 옥천 조씨의 시조인 문하시중 조장(趙璋)이며, 아버지는 옥천 부원군으로 추증된 조전(趙佺)이다. 아들은 조영(趙瑛),조유(趙瑜등이 있다.

조원길은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하자 순창에 은거하여 세속을 멀리하고 농은(農隱)이라는 작은 움집에서 소요(逍遙)하며 지냈다. 1390(공양왕 2) 사망하였으며, 이색(李穡) 등과 더불어 오은(五隱)으로 불린다.

유등면 건곡리에 묘소가 있다. 부인 조씨와 합장묘이며, 고려 시대 능묘 양식이다. 1391년 예장 당시 아들인 조유가 세운 묘표가 있다. 옥천 부원군 조원길 묘·묘표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창의 무이서원(武夷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옥천부원군 조원길 묘·묘표
옥천부원군 조원길 묘·묘표

 

기충각(紀忠閣)

기충각은 유등면 건곡리에 있는 개항기 초계 최씨의 시조 최산두를 기리는 사우다. 학촌 기충각(鶴村紀忠閣)은 최산두(崔山斗)(1483~1536)의 학덕과 충의를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64(고종1)에 세운 것으로, 정면 2,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건물이다. 최산두의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 본관은 초계(草溪)로 초계 최씨(草溪崔氏)의 시조이다. 1513(중종8)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기묘사화로 전라도 동복현(同福縣)(현재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지역)에서 1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뒤에 신원되어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는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에 있다.

현재 순창읍에서 유등면 소재지로 가는 중간 지점인 건곡리 학촌 마을 입구 도로변에 최산두 기충각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쪽 약 20m 지점에 면 2,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건물인 학촌 기충각이 있다. 학촌 기충각 내에는 최산두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학촌 기충각은 초계 최씨 문중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학촌 기충각
학촌 기충각
최산두 기충각비
최산두 기충각비

 

삼열지려·정금대·조유 장군 묘 덕석

이 밖에 진주 하씨 집안 며느리 3명의 열부 정려를 기록한 3(三烈) 정려비인 진주하씨 삼열 지려, 옥천부원군 조원길의 아들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낸 낙재(樂齋) 조영(趙瑛·1344~1428)이 순창으로 낙향하고 북쪽으로 개성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뜯어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정금대(停琴臺)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한 조유 장군의 묘 덕석 등의 유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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