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규완-내가 겪고 생각하는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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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규완-내가 겪고 생각하는 5·18
  • 김규완 순창군청 안전재난과
  • 승인 2022.05.18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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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이다. 나는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즈음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 찾아왔는가 싶었는데,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해빙의 분위기가 급속하게 냉각되며 다시금 동토의 땅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나는 입시를 앞두고 공부에 매진해야 했던 고교생의 처지였기에 정치와 시국에 관심을 두기는 이른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해 5월은 예사롭지 않았다. 학우들에게 이래저래 전해들은 흉흉한 소문 속에서 광주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우리 고등학생들마저도 크게 동요하면서 새로 등장한 신군부 세력의 만행에 대한 분노와 성토와 저항의 기운이 타올랐다.

전주에서는 여러 학교의 총학생회가 연대하여 신군부 세력에 대한 반대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사전에 누출되어 대부분의 학교는 시위가 무산되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거행일(D-Day)에 예정대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실을 박차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너나 할 것 없이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시위는 그게 처음이었다. 어느새 학교 밖 전주천 도로에는 장갑차와 군인들이 도열하여 우리 대열과 대치해 있었고 여차하면 교정 안으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학교 주위로 모여드는 시민과 학부모들도 늘어갔다. 시위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다가 강당으로 집결하여 토론을 이어갔다. 교사와 학생들의 많은 의견이 분출되었다. 당장 거리로 진출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부터 무고한 피를 흘릴 수 있으니 교내 시위를 하면서 앞으로의 투쟁 방향을 설정하자는 등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물론 교사들의 회유와 특히 교장 선생의 간곡한 자제 요청이 있었고, 군경의 물리적인 교내 진입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난상토론이 이어지던 중 학교 측으로부터 전격적인 휴교령이 내려졌다. 시위의 지속과 확대를 막으려는 불가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학교 당국의 결정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계엄령 하에서 시위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신군부의 특단의 조치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1주 이상 학교를 나갈 수가 없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학우들과 계속해서 투쟁을 주장한 일부 강경론자들은 경찰조사와 수배 대상이 되어 학업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데모할 때는 절대 앞서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극구 말리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이렇게 나의 5·18은 싱겁게 시작되고 끝났다. 그런데 그때 광주시민들은 또다시 되풀이될 독재 권력을 용납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담보한 핏빛 투쟁을 끝까지 불사하며 항거한 것이다. 이후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내내 전 사회적으로 저항 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어지러운 시국은 계속되었다. 무엇보다도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대한 단죄와 직선제 개헌을 위한 투쟁이었다. 강의실에도 최루가스가 난무했고 학교의 민주광장과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마시며 전투경찰과 맞서 싸우는 일이 내 대학 시절의 일상사가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가열찬 대오에 동참한다는 명분을 따르고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싱겁게 끝나버린 5·18에 대한 나의 초라한 실패와 광주 희생자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3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 거리에서 목 놓아 외쳤던 구호와 운동가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숱한 이들의 희생과 노력 끝에 5·18의 진실이 규명되기 시작했고, 1996년에 마침내 5·18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립되었으며, 가해 책임자였던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단죄의 과정도 있었다. 이제 5·18은 국가기념일이 되어 당시 집권당의 후신인 지금의 여당 소속 국회의원들까지도 자랑스러운 5·18 광주인상을 수상하거나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5·18 학살의 주역인 전직 대통령의 사죄가 우선해야 했는데 끝내 사죄 없이 지난해 11월 생을 마감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역사는 살아생전 사과는 고사하고 회고록에서도 반성조차 없었음을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5·18의 진상 규명이 지속되고 있고 5·18 정신을 역사 속에서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18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고 민주화의 금자탑이지만 이는 단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5·18의 민주 정신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시금석이 아닐 수 없다. 이에 5·18의 세계화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현재 광주 5·18 관련 단체 및 지자체에서 5·18 역사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의제화하여 5·18 관련 연구 기반으로 활용하고 그 역사가 후세에 면면히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둘째,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된 기록물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만 아직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5·18 기록물들을 한데 모아 국가적 차원의 기록물로 일원화해야 한다.

셋째, 5월 정신 계승 예술제를 국가예술제로 확대하여 5월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국민뿐 아니라 인류가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행사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며 면면히 흐르듯이 새로운 시대와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새 세대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되겠지만 민주주의는 여전히 가장 소중한 사회적 기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좌표로 자리 잡은 5·18의 세계화를 위해 모두가 다시 한 번 성찰하고 동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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