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담농사일기(23) 물이 온다
상태바
햇담농사일기(23) 물이 온다
  • 차은숙
  • 승인 2022.05.18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은숙(글짓는농부)

물이 온다

마을 앞 긴 수로에 물이 흐른다. 모내기철이라 논에 물을 대느라 수로의 물길이 열린 것이다.

그 물은 마을 뒤쪽에 있는 저수지 용내제에서 시작한다. 물은 뒷산 어귀를 지나, 핏줄처럼 이어진 수로를 따라 마을 앞까지 오면 이제 길을 따라 횡으로 긴 수로를 흐른다. 그러다가 용내뜰의 농로로 직진한다. 수로에 물이 지나기 시작하면 신록이 돋아나는 것처럼 마을에도 물이 오르고 한껏 부산스러워진다.

마을 어르신이 수로의 물을 가두고, 당신 논의 물고를 열면 봄 가뭄에 바싹 말랐던 논에 물이 온다. 물이 찬다! 논바닥이 젖으면서 논에 물이 차는 걸 볼 때면 마음도 물렁하고 넉넉해지는 것 같다. 물을 댄 무논의 풍경이 펼쳐지면 용내뜰의 모습이 바뀐다. 그러면 마을도 달라진다.

물이 오는길
마을 앞 수로

 

빨간색을 채워가는 농장

무논으로 바뀌는 동안, 농장은 빨간색을 채워간다. 날마다 토마토가 익기 때문이다. 비로소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시기다. 수확을 해야 수익을 얻으니까 당연히도 기쁘겠지만 열매를 따는 것 자체가 주는 순수한 기쁨이 만만치 않다. 물론 수확이 공판이라는 도매 시장에 나가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을 때, 너덜거리는 마음은 수선할 길이 없고, 그래서 수확은 기쁨이 아니라 노여움이 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아직은 기쁨이 더 크다.

농사가 힘들지 않느냐는 한결같은 사람들의 질문에 내가 내놓는 대답도 대개는 비슷하다. 괜찮다, 재밌다. 예쁘다. 그리고 단순한 노동의 편안함이 너무 좋다고. 이런 자연이 주는 위로또한 참 고맙다고.

살다보면 위로가 필요하다. 굳이 뭔가에 크게 상처 받아서라기보다, 해묵은 상처도 덧나고, 뜻하지 않게 누군가에게 준 상처에 내 맘도 긁힌다. 가까운 지인이 오래 아프기도 하고, 가족과의 이별로 윗옷에 팔을 넣다가, 신발을 신다가도 울컥한다. 어느 때는 키우는 개조차도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상한다. 도시에 살 때는 더 많이 부딪치고, 부대끼고, 깨지고, 멍들었는데 그것들을 어디서 위로 받았는지…….

5월 무논
5월 무논

 

헤아린다는 말

이 말이 참 좋다. 사전적 의미는 수를 센다는 뜻, 짐작하거나 가늠하여 미루어 생각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어디서 처음 만났을까? 별 헤는 밤이었을까? 사람들은 별을 센다고 하지 않고 별을 헤아린다고 하지.

헤아린다의 첫 번째 의미는 수를 센다는 것인데 이는 정확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짐작한다는 것은 숫자로만 알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둘의 의미가 상충한다기 보다는 확장하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니 그 많은 별 하나를, 또 그 많은 뭇별을 헤아려 보는 것이리라.

그런데 막상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게 쉽지 않다. 마음이 힘들겠구나. 몸도 고단하겠네. 입이 쓰겠네. 입술도 부르텄네. 어째 눈이 쑥 들어가고 생기가 없어 떼꾼하네. 그렇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짐작하는 일. 나야 헤아리는 일이 어렵다지만, 그런 일에 능한 누군가를 만나면 나도 그냥 나긋해진다.

 

위로와 기쁨을 주는 농작물

농사짓는 일도 내가 농작물의 상태를 가늠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참 좋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교감이야 아직 멀었지만, 이 나무는 잎이 작아 열매가 버겁겠구나, 곁순이라도 키워서 힘을 보태줘야겠네.

또는 너무 왕성하니 잎을 더 제거해야 열매를 알맞게 키우겠네. 또 이 나무는 잎도 크고 나무도 굵고 힘이 좋으니 잘 버티고, 더 좋은 열매를 끝까지 키우겠지. 하면서.

서툰 농부인 내가 헤아려 준 것도 없는데 농장의 토마토 나무들은 나를 헤아리는 듯 날마다 위로와 기쁨을 준다.

토마토가 익어가고, 논에 물이 오고, 여기저기서 모를 심는다.

그리고 빨간색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
  • 순창군청 여자 소프트테니스팀 ‘리코’, 회장기 단식 우승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