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 역사] 조선 중기의 두 여성,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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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 역사] 조선 중기의 두 여성,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6.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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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과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성 문인이자 예술가다. 모두 강원도 강릉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재능을 키우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들의 흔적이 담긴 장소는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지만 그 모습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신사임당의 오죽헌은 입구부터 웅장하고 드넓지만, 허난설헌의 초당동 기념공원은 기와집 몇 채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신사임당이 조선시대 지배적 이념을 상징하는 인물로 오늘날까지 한국 주류사회로 이어진 반면, 허난설헌은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 대표 사상가의 어머니 신사임당

사임당 신씨는 조선 중기의 화가·작가·시인이자, 성리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화가 이매창 등의 어머니다.

본관은 평산(平山), 1504년 강원도 강릉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딸 중 둘째였다. 그림·서예·시 재주가 탁월했고, 성리학적 지식에도 해박했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했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별채를 의미하는 당()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했다. 딸의 총명함과 재능을 아낀 아버지는 그녀를 곁에 계속 두고 싶어 자신들 가문보다 낮은 집안 자제 이원수를 딸의 혼처로 맞았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아들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 수 있었다. 사임당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환경이 크게 좌우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사임당이 남긴 한시 3편이 있다. 그 중 1537년 당시 3세였던 율곡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 고개에 이르러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가 있다.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 번 바라보니/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村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靑)

 

화가 사임당

율곡 이이는 <선비행장>(先妣行狀·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어렸을 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라며 평소 묵적(墨跡)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한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고,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사임당이 뛰어난 화가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현재 채색화와 묵화 등 약 40, 글씨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있다. 그런데 사임당의 그림은 대다수가 신사임당의 작품이라는 증거는 없고 전칭작(傳稱作), 즉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어 전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한 사람이 그렸다고 보기엔 화풍의 편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사진> 신사임당 그림으로 전하는 묵포도도

 

성현(聖賢)의 어머니

16세기까지만 해도 사임당은 화가로 조명되었고, 호칭 또한 화가 신씨(申氏)’였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화가로서의 사임당은 사라지고 율곡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더 크게 부각된다. 율곡을 선하(先河·효시)로 하는 서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그 무리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사임당은 유교적 부덕(婦德)을 갖춘 율곡 선생을 낳으신’ ‘성스런어머니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서인의 종주로 받들어진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은 평가의 대상이 아닌, 우러러보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현모양처?

신사임당 하면 떠오르는 것이 효성 지극한 딸,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여인, 덕과 인격을 갖춘 바르고 착한 부인,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어진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런데 율곡은 <선비행장>에서 아버지께서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하셨다고 적은 것처럼 신사임당은 여필종부보다는 때로는 남편도 꾸짖는 여인이었다.

슬기로운 어머니이자 좋은 아내라는 뜻의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용어는 조선시대까지는 그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현모(賢母)’가 비슷한 어의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양처(良妻)’는 전혀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처는 천인(賤人) 신분 남자와 결혼한 양인(良人) 신분의 처()를 의미했다.

현모양처는 일본 교육자인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1875년에 창안한 용어이다. 남성이 직업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한다면 여성은 가정 내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임무라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개항기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어 일제강점기와 현대를 거치며 재구성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한국에 존재했던 여성의 덕목인 열녀효부’(烈女孝婦)는 결국 잊히고 현모양처로 대체된다.

일제강점기에도 사임당을 추켜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일제는 사임당을 현모양처(賢母良妻)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조선인 징병을 독려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는 신사임당을 근대국가의 기념인물로 만들고, 권력이 요구하는 여성상을 신사임당에게 부착시켜 상징정치에 활용했다. 이에 따라 신사임당은 교육자이자 문학가, 또는 현모양처이거나 성인(聖人)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역사를 근대의 현모양처 신사임당의 현신으로 비유하고, 국모로 사임당과 동일시하는 각인 작업을 언론을 통해 전개했다.

이처럼 신사임당을 수식하는 겨레의 영원한 어머니라든가 현모양처등은 실재했던 진실이라기보다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담론의 효과였다 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

난설헌 허씨는 조선 중기의 시인·작가·화가이다. 아름다운 용모에 일찍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글과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 214수의 한시와 국한문 내방가사 <규원가>(閨怨歌)<봉선화가> 등을 남기고 27세에 요절했다.

 

소문난 천재 집안

1563년 강릉 초당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초희(楚姬),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조선시대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 이조판서를 지낸 첫째 오빠 허성((許筬·1548~1612), 빼어난 문장가였던 둘째오빠 허봉(許篈·1551~1588), <홍길동전>을 지은 동생 허균(許筠·1569~1618) 등 부친과 남매 모두 문장에 뛰어나 허씨 5문장’(허엽·허성·허봉·허난설헌·허균)이라고 불렸다.

8살 때 <광한루전백옥상량문>(廣寒樓殿白玉上梁文)을 지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둘째오빠 허봉은, 서얼 출신으로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손곡(蓀谷) 이달(李達·1561~1618)에게 허난설헌과 허균의 시 공부를 맡겼다.

허난설헌의 어릴 적 작품 <앙간비금도>. 아버지와 손잡고 날아가는 새를 보는 그림이다.

 

불행한 삶, 시로 달래

157715세에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1562~1593)과 혼인했다. 남편은 그녀의 글재주에 주눅이 들어 밖으로 나돌며 기생집 등을 전전했고, 시부모는 시를 쓰는 며느리를 구박했다. 그런 와중에 애지중지 키우던 어린 남매는 연이어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고, 배 속 아이마저 유산된다. 허난설헌은 자식의 죽음 앞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을 곡한다<곡자>(哭子)를 눈물로 썼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땅이여/ (중략) / 부질없이 황대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인다(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哀哀廣陵土/ 肅肅白楊風/ 鬼火明松楸/ 朗吟黃坮詞/ 血泣悲呑聲).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길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네./ 추워도 주려도 내색 않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중략) / 베틀에는 베가 한 필 짜였는데/ 뉘 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하략)

가난한 여인을 노래함이란 뜻의 <빈녀음>(貧女吟)이다. 다른 여인의 혼수감이 될 옷감을 짜는 노처녀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불평등한 상황을 비판하는 시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이 시를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이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라고 극찬했다.

 

27세에 요절

설상가상으로 친정마저 몰락해 갔다. 아버지는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객사했고, 오빠 허봉은 율곡 이이를 비판하다가 변방으로 귀양을 떠나 객사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스러운 건 첫째, 조선에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것이다.”

1589년 초 27세 꽃다운 나이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다. 죽기 전 자신의 작품들을 소각하고 친정에 있던 시와 그림들도 모두 태워달라고 했지만 이를 아깝게 여긴 허균은 이를 보관했다.

 

중국에 분 허난설헌 열풍

정유재란(15971599) 즈음 명나라 사신 오명제(吳明濟)가 조선에 들어왔다가 조선의 한시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병조좌랑이던 허균의 집에 머물면서 허균이 외워준 시를 바탕으로 신라부터 조선에 이르는 100여 명의 문집을 담은 조선시선을 편집했다. 이 가운데 허난설헌의 시 58수도 실렸다.

1606년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당시 사신을 맞는 영접단 종사관이었던 허균에게 허난설헌의 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그는 허균이 건넨 난설헌의 시를 읽어보고 매우 감탄하고, 난설헌집서문을 지어주었다. 이로써 난설헌집은 그녀의 사후 19년 만인 1608년에 간행된다.

난설헌집은 이후 중국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조선을 찾은 중국 사신들은 앞 다퉈 허난설헌의 시집을 구해달라고 아우성쳤다. 난설헌의 시를 164수나 수록한 문집 긍사(亘史)에서 편집자인 반지항(潘之恒·1556~1622)은 허난설헌을 이렇게 극찬한다.

조선에 한나라 반소(유명한 여류시인)와 견줄 수 있는 여인이 있다. 조선의 군신들도 그녀보다 앞서지는 못할 것이다.”

명나라 후기 문관이자 희곡가인 탕현조(湯顯祖·1550~1616)내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됐다, 이역(異域)에 이처럼 출중한 여인이 있었단 말인가라며 감탄했다.

 

16세기를 살다 간 근대인

난설헌집1711년에는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조선왕조를 넘어 동양3국에 여성의 시가 알려지고 평가받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봉건적 조선 사회에서 인본주의를 갈구하며 끝없이 시심을 갈고 닦은 허난설헌은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그녀는 16세기에 살았으면서도 신분제와 가부장제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고 있던 근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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