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주 강경마을 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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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주 강경마을 노인회장
  • 정명조 객원기자
  • 승인 2022.06.2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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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 때 상경했다가 74세에 돌아온 고향

“옛날에 여기서 똥장군까지 다 져봤어”
아내 김옥섭 씨와 박인주 노인회장
아내 김옥섭 씨와 박인주 노인회장

 

옛날에 여기서 살면서 똥장군까지 다 져봤어. 소 갖고 쟁기도 해보고 경험이 없을 때는 이런 거 전부 소로 갈아야지, 근데 소 없을 때에는 남한테 갈아달라고 얼마나 사정하고 저기해야 되는지. 그전에는 물이 없으니까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모를 심는 천수답(天水畓)이야. 비가 올 때 한꺼번에 모를 심으니까 소가 없는 거야. 이거 심지도 못해. 소 있는 사람들만, 부잣집들만 심고, 없는 사람들은 그냥 물 빠져들고 또 다음에 비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 지금은 냇가에서 물을 품어서 농사짓기 때문에 괜찮지.”

지난 530일 적성 강경마을에서 만난 박인주(83) 노인회장은 젊은 시절 살았던 환경을 떠올리며 담담히 얘기했다. 그는 산 넘어 인계 마흘리에 사는 아내와 중매결혼을 했다.

마을 중간에 있는 집(강경길 159-171)에서 태어났고 마을 왼쪽 가장 위에 집(강경길 159-23)에 살 때 내가 결혼했어. 집사람(김옥섭·79)이 사는 인계면 마흘리에 가서 결혼식 하고 와서 여기 살았지. 옛날에는 결혼하면 처갓집에서 결혼식을 하고 거기서 이틀 밤 자고 3일 만에 이쪽으로 오고 그랬어. 부잣집들은 말도 타고 가마도 타고 그랬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냥 걸어 다녔지

 

6·25 피난과 마을 전소(全燒) 사연

6·25때 강경마을 전체가 불탔다는 것을 들었던 기자는 그 이야기를 물었다.

“6·25 전에도 6·25 후에도 빨치산들이 와서 귀찮게 하니까 피난을 나갔지. 여기서 피난 나갈 때에는 내월리도 가고 지북리와 인계면으로도 갔어. 가을에 농사 수확하고 그 이듬해 농사지을 때까지는 무조건 나가야 돼. 6·25 때 식량을 다 못 갖고 나가잖아. 농사짓는 지금 같으면 차가 있어야 가지고 다니지만, 옛날에는 전부 지게로 져 날라야 하는데 못 하니까 땅을 파고 독을 묻어. 막 이렇게 큰 거, 거기다가 식량 채워놓고 가지러 올 적에는 군인이나 경찰을 동행해서 와야 돼. 빨치산들이 내려올까 무서우니까. 그리고 625 때 우리 마을 전체가 불에 타 버렸지.”

 

강경마을에 있었던 석산국민학교

박 노인회장은 순창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80대 이상 되시는 분들만 알만한 얘기를 들려줬다.

우리가 국민학교 4학년 2학기 때 6·25가 난 거야. 1학기는 석산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이 밑에 내려가면 도로위에 조그마한 정자가 있지. 밀양 박씨 제각이 하나 있어. 그 안에 학교가, 옛날 일제시대 관립학교(괄립학교)라고 있었어. 그건 적성국민학교보다 일찍 생겼어. 그 때에는 석산국민학교 다닌 사람들 중에 아이 아빠도 있었어. 일제시대 때에 공부는 해야 되는데 학교가 공부를 안 가르쳤으니까 늦게라도 배우려고 때를 놓쳐서 나중에 배우려고 아이 아빠도 학교에 온 거야.”

 

아이 아빠도 다녔던 석산국민학교

일제강점기 시절 주민들은 핍박을 받으며 배우지 못한 한까지 가슴에 얹고 살아야 했다. 박 노인회장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많은 회한이 남은 듯 보였다.

그래서 석산국민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연령 차이가 많이 났어. 두세 살 많은 동네 형도 학교에 가면 동급생이야, 동급생. 그땐 여기 내적 사람들도 오고 구남, 평남 사람들도 석산국민학교를 다녔어. 왜냐하면 적성국민학교보다 이 학교가 먼저 생겼기 때문이지. 석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적성국민학교가 생기니까 이제 그리로 갔지.”

지인과 찾아간 석산국민학교 터는 흔적조차 없었다. 안타깝게도 석산국민학교 사진 1장조차 남아 있지 않아, 모습을 짐작하기도 어렵다. 박 회장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시대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4학년 1학기까지 석산국민학교에서 배우고 2학기에 적성국민학교로 갔는데 6·25가 터지는 바람에 학교를 못 다니게 돼버렸지. 석산국민학교는 6·25 이후에 마을이 불에 타면서 없어졌어. 그러니까 6·25 나기 전까지는 학생들이 다녔어. 우리가 4학년 1학기까지 6월에 전쟁이 났으니까 4월까지 석산국민학교를 다닌 거지.”

 

농사로 먹고 살기 힘들어 상경

박인주 노인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석산국민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되어 해방 후에 학교를 못 다녔던 근처 주민들이 이 학교에 다녔으며 교실, 숙소, 작은 운동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박 노인회장은 그때 마을환경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새마을운동이 있기 전에는 길이 아예 없었어. 저기 밑에서 농사지어 가지고 나락 열다발씩 묶어놓은 거 한 짐씩 짊어지고 좁은 논두렁길로 올라왔어. 천렵은 매번 했는데, 마을 초입 섬진강에 고기가 엄청 많았어. 뱀장어, 꺽지, 빠가사리(동자개) 이런 게 족대질하면 한 바구니씩 잡혔어.”

박 노인회장은 32세 때 마을을 떠나 상경했다가 10년 전쯤인 74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떠났던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자식 둘까지는 버텼는데 셋째가 태어났잖아. 그랬더니 계산이 안 맞아. 셋째를 막 낳았는데 먹을 것도 없고, 또 농사 지어갖고는 도저히 못 먹고 살 것 같기도 하고, 애들도 못 가르칠 것 같아서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지. 어느 날 사촌동생이 형님 그 고생하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셔라고 하는 거야.

사촌동생이 먼저 서울로 가서 요코(스웨터 가내수공업)라고 일본에서 물량을 받아서 스웨터를 짜는 일을 넘겨줬어. 농촌에서 일년 농사 지어봤자 쌀 몇 가마밖에 안 되는데, 스웨터를 짜면 한 달이면 일년 농사짓는 것보다 더 많이 벌어. 서울에서 그 일하면서 아이들 키우고 교육시키고 그랬지.”

 

나는 항상 고향 순창이 좋았어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으로 향한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일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박 노인회장은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나는 항상 고향이 좋으니까, 그리고 땅도 있고 해서 매년 자주 고향을 다녀갔지. 이제 자식들 다 여의고 거기 살아도 우리 둘, 여기 살아도 우리 둘 그러니까 고향으로 돌아왔지. 아들이 서울로 오라고 하는 데 갈 필요도 없어. 인자 여기서 그냥 우리 둘이 복작복작 살아야지.”

박인주 노인회장은 사연 많은 서울살이를 마치고 2013년에 강경마을에서 살면서 2년 동안 현재 살고 있는 집(강경길 159-171)을 지었다.

박인주 노인회장은 2015년부터 아내 김옥섭 씨와 함께 행복한 노후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환한 미소를 짓는 박인주 노인회장의 표정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고향 순창이 노인회장 부부에게 선뜻 내어준 삶의 푸근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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