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우리 역사] 조선 중기 대표 여성시인 매창, 이옥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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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우리 역사] 조선 중기 대표 여성시인 매창, 이옥봉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09.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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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가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들을 객관적이면서도 주체적 시각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옥봉-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시인

이옥봉(李玉峰·?~1592)은 서녀라는 신분 굴레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문장과 독보적인 시풍을 선보여 천고의 절창이라 극찬 받았다. 생몰 연대는 분명치 않다. 명종선조 연간의 시인으로 16세기 후반기에 시작 활동을 했고 임진왜란에 순절한 것 같다.

양녕대군의 고손자로 옥천군수 등을 지냈던 자운(子雲) 이봉(李逢·1526~?)의 서녀로 운강(雲江) 조원(趙瑗·1544~1595)의 소실이다. 본명은 숙원이다. 아버지 이봉은 그녀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해마다 책을 사주었으며, 특히 시재(詩才)가 뛰어났다.

서녀였지만 왕실의 후예라는 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양반가에 첩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왕이면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짝으로 삼으리라 각오했다. 마침 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운강 조원. 이조판서를 지낸 신암 이준민의 사위였다. 부친은 그 뜻을 알고, 조원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그의 장인에게 사정했다. 빼어난 시문과 아름다운 자태에 감복한 이준민은 사위를 설득했다. 조원이 진사시험에 장원한 1564년 옥봉은 그의 첩이 되었다.

조원은 1564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1575년 정언이 되었으며, 이조좌랑·삼척부사를 거쳐 1593년 승지에 이르렀다. 조원은 용모도 빼어나고 글재주도 뛰어난 옥봉을 매우 사랑했던 것 같다. 혼인 당시 조원은 옥봉에게 앞으로 다시는 글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약조를 받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옥봉은 운강이 괴산군수·삼척부사 등 외직에 나갈 때도 동행했으며, 운강은 옥봉의 글재주를 인정해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도 글을 짓게 했다. 옥봉은 병마사에게 주는 시를 짓고, 목사 서익의 소실에게도 감사의 시를 써서 보내고, 단종의 능에 가서는 단종을 위로하는 시를 짓는 등 활달하게 시작 활동을 했다.

부안군 부안읍 매창공원에 자리한 매창테마관
부안군 부안읍 매창공원에 자리한 매창테마관

 

남편의 관직생활

조원은 1575(32) 사간원 정언(6), 1576(33) 이조좌랑에 올랐다. 이조좌랑은 정 6품이나 이조정랑과 함께 전랑이라 불리며 문관의 등용과 승진을 맡아보는 인사 실권자로, 조선시대 관직의 꽃이라 불리는 자리다. 그런데 1578(35) 자신의 친척을 관리에 임용했다고 탄핵을 받아 이조좌랑에서 물러난다.

바로 이때가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처절한 싸움이 시작될 때였다. 조원은 서인을 대표해 동인을 공격하다가 동인의 반격을 받고 좌천된 것이다. 그는 중앙정계에서 물러나 지방 관리로 떠돌게 된다. 35세부터 10여 년 괴산현감·삼척부사·성주목사 등 외직을 전전한다.

그러다가 48세 때, 임란 1년 전인 1591년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어 중앙 정계로 복귀한다. 사헌부란 요즘으로 치면 검찰이다. 사헌부의 수장은 대사헌이고 집의는 바로 그 아랫자리니, 검찰청 서열 2위 자리에 복귀한 것이다.

 

사람을 구했지만 사랑을 잃게 한 시

1589년부터 1592년 사이의 일이었다. 파주에 조원의 조상 묘가 있는데, 그 묘지기가 소도둑 누명을 쓰게 되었다. 조선시대 소도둑은 사형 당할 수도 있는 중죄에 해당한다. 묘지기의 아내가 다급하게 조원을 찾아왔다. 마침 조원은 출타 중이었고, 사정이 급해 옥봉은 시를 한 수 적어 묘지기 아내에게 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파주목사에게 가지고 가면 될 것이다.”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맹물을 기름삼아 머리를 빗네./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남편이 어찌 견우이리오.- <원통함을 아룁니다>(爲人訟寃·위인송원)

洗面盆爲鏡/ 梳頭水作油/ 妾身非織女/ 郞豈是牽牛

견우직녀설화를 차용한 이 시에서 견우와 직녀는 서로 부부이고, 남편 견우(牽牛)의 한자(漢字) 뜻은 소를 끈다’, 소도둑이라는 말이다. 종합하면 머릿기름도 없이 청빈하게 사는 여인이 직녀가 아니라면, 그 남편도 견우, 즉 소도둑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이 시를 본 파주목사는 묘지기를 석방했다. 물론 시의 내용에 감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헌부 집의의 아내가 파주목사에게 서찰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파주목사에게는 큰 압력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검찰청 2인자의 첩이 지방관에게 압력을 넣어 중죄인이 풀려났다는 이야기다. 조원 입장에서 생각하면 동인의 탄핵으로 10년을 외직으로 떠돌다가 겨우 한양으로 와서 사헌부 집의가 되었는데, 집에서 아녀자가 사고를 치고 만 셈이 된 것이다.

조원은 옥봉을 쫓아내면서 말하기를 어찌 백정의 처를 위해 시를 지어 주어 감옥의 죄수를 풀어주게 하여 남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는가? 이는 그 죄가 커서 어쩔 수 없으니 즉시 자네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다. 이씨가 울면서 빌었으나 조원은 끝내 듣지 않았다.

 

달빛에 물들인 신화

옥봉은 남편에게 버림받았지만 그를 원망하지 않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시로 남겼다. 다음은 대표작 <몽혼>(夢魂)이다.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달 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을.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꿈속에서 넋이 님에게 오간 흔적으로 문 앞 돌길의 절반이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 은유가 탁월하다.이옥봉은 임진왜란 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애오라지 제 출세만 생각해 옥봉을 버린 조원은 권력 주변을 서성이다가 임진왜란 중인 1595년 병사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에게서 시집 한 권을 받는다. 놀랍게도 부친 조원의 첩인 이옥봉 시집이었다. 대신이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40여 년 전 명나라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돌아, 사람을 시켜 건져 올리도록 했다. 주검은 종이로 수백 겹 말려 있었고, 안쪽 종이엔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가 빼어나 책으로 엮었다. 말미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원의 셋째 아들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이 없다. 다만 1606년 허균과 함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 일행을 맞이한 적은 있다. 종사관은 중국 사신이 조선 땅에 발 디딜 때부터 이들을 수행하며 접대하는 직책이다. 향응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문장으로 나라의 자존심을 세우는 역할도 했다.

소설가 이병주는 햇빛에 바래면 역사요, 달빛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못난 정인에게 버림받아 불행하게 죽어간 여인 이옥봉의 시혼, 당대 사람들은 달빛에 물들이고 또 다듬어 그런 신화를 빚어낸 것이었다. 그의 시는 중국에 알려졌으며, 33 수의 시가 실린 그의 문집 옥봉집은 조씨 가문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에 부록으로 되어 있다.

여러 문인들이 그녀의 시를 칭찬했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자신의 누이 못지않은 천재 시인이라 평했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이옥봉이 국조(國朝) 제일의 시인이라 칭송했다. 이수광(李晬光)은 옥봉의 시 세 편을 소개하며 아름답다고 평했다.

 

매창, 최고의 기생 시인

매창(梅窓·15731610)은 전북 부안(扶安) 출신 기생이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 문사인 유희경(劉希慶이귀(李貴허균(許筠) 등과 교유가 깊었다.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이다.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애칭이 계랑(癸娘·桂娘)이다. 아버지는 부안현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이다.

 

유희경과 운명적 만남

매창은 여느 기생과는 달리 절개가 곧았다. 그러한 매창이 한눈에 반해 정을 준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촌은(村隱) 유희경(1545~1636)이다. 천민 출신이지만 시를 잘 지어 영의정 박순 등 사대부들과 교유했다. 예법에 밝아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가의 상례를 주관하는 예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유희경은 159146세 때 남도를 방랑 유람하다가 부안에서 처음으로 매창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말로만 전해 듣던 18세 꽃다운 매창을 만나게 되자 벅차오르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일찍이 남국의 계랑 이름 들어 알고 있었네/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야 진면목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것 같구나·- <계랑에게>(贈癸娘·증계랑)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今日相着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28년이란 많은 나이 차이도 두 사람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하도록 시에 화답하며 술잔이 오고 갈수록 정분이 깊어가면서 이내 두 사람은 원앙금침에 들어가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한 쌍의 원앙같이 아름답던 이들의 사랑은 봄날 배꽃 피는 시간만큼이나 잠깐이었다. 유희경이 상경하고는 그 즈음 임진왜란이 일어나 유희경이 의병으로 종군하면서 기약 없는 긴 이별이 이어진다. 매창은 시를 짓고, 또 지으면서 오랫동안 절개를 지켰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이별시의 백미로 꼽히며 우리나라 각종 고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이 작품은 유희경을 이별한 뒤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라는 주가 붙어 시조집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온다. 유희경이 사랑하던 매창의 곁을 떠나간 지 1년 후 간단한 편지 한 장과 동봉한 시 한 편이 바람처럼 전해왔다. ‘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기만 하고/ 떠도는 나그네는 그리움에 잠 못 이루네/ 소식조차 끊겨 애가 타는데/ 오동잎 찬비 소리는 나를 울리네.’ 매창은 보내온 편지와 동봉된 시를 밤새워 눈물로 읽으며 유희경을 향한 그리움을 수많은 시로 남겼다.

봄날이어도 추워서 엷은 옷을 깁는데/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네. - <자한>(自恨)

春冷補寒衣/ 紗窓日照時/ 低頭信手處/ 珠淚滴針絲

매창의 한시 가운데 절창으로 꼽히는 <추사>(秋思)이다.

어젯밤 찬 서리에 기러기 울어 예니/ 님의 옷 다듬질하던 아낙네는 남몰래 다락에 올랐네/ 하늘 끝까지 가신 님은 편지 한 장도 없으니/ 높다란 난간에 홀로 기대어 남모를 시름만 깊어지네.”

유희경과 이별 이후 두 번째 사랑이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李貴)였던 것 같다. 율곡의 제자에 명문가 출신으로 군수인데다 글재주까지 뛰어났으니, 둘 사이에 연정이 싹텄음은 자명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허균과의 인연

세 번째 사랑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다. 그런데 허균과는 선을 넘지 않은 정신적인 사랑이어서 더 애틋하다. 허균은 1601년 조운판관(漕運判官)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 부안에서 처음 매창을 만난다. 둘은 이내 시()로서 의기 소통하여, 종일 술잔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허균은 이귀의 후배로, 매창이 그의 정인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왼 종일 술과 시를 나누면서도 함께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다. 허균은 첫 만남 이후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파직되어 전국을 유랑하던 때에 매창이 있던 부안으로 내려온다. 그 후 다시 출사해 매창에게 보낸 편지에 만일 그때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었더라면, 우리가 이처럼 십년씩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겠느냐는 내용으로 보아 둘은 끝까지 정신적 연인으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재회, 영원한 이별

매창이 서른이 넘었을 때, 유희경이 부안으로 매창을 찾아온다. 1607, 매창이 죽기 3년 전이다. 두 사람은 15년 만에 다시 만나 열흘을 함께 지냈다. 다시 만나 시를 논하자던 매창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었다는 유희경은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매창은 1610년 부안읍 봉덕리 공동묘지(지금의 매창공원이 들어서 있는 곳)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향년 37. 허균은 매창의 부음을 듣고 그를 슬퍼하는 글을 남겼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했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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