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와 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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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와 쌀밥
  • 김효진 이장
  • 승인 2022.09.2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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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이장(풍산 두지)

명절이라고 오일장에서 옷 한 벌 맞춰 입어본 적은 없지만, 어릴 적 한가위를 맞이하는 마음만큼은 늘 풍요로웠다. 추석을 앞두고는 어른들 못지않게 아이들도 분주했다. 집집마다 부엌 한쪽에 작은 항아리를 마련하고선 어둠이 한참 남은 새벽을 이산 저산으로 휘젓고 다녔다. 상수리나무 군락이 있던 수박바위 주변 산과 밤나무가 많았던 동네 뒷산 무시밭골엔 조그마한 미등을 든 아이들로 산은 이미 잠을 깨고 있었다.

간혹 어른들도 나왔는데 사슴벌레가 숨어 사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를 큰 돌로 한 번씩 쿵쿵 울려대면 상수리가 우수수 쏟아지곤 했다. 얼마나 주웠냐며 불룩해진 보자기를 각자 내밀어보이면 남들보다 한줌이라도 더 주워보겠다는 심사가 나서 다음날 새벽은 다른 아이보다 먼저 일어나 산으로 향했다. 독항아리에 상수리와 알밤이 채워지고 추석은 어느덧 목전에 와 있었다. 가난했지만 집집마다 상수리 묵을 쑤어 먹을 정도는 되었다.

올해 한가위는 풍성하지 못하다. 우선 절기상 추분 가까이 추석이 들어야 오곡백과는 아니더라도 햇곡식 구색이라도 맞추는데 이번엔 산과 들에서 딱히 준비할 게 마땅치 않아 서운함이 많다. 오일장은 그래도 제법 팔고 사려는 사람들로 대목을 맞았다. 몇 해 코로나 여파로 명절 나들이를 주저하던 자식네들이 이번에는 다들 내려온다 기별한 모양이다.

물가가 올라 상인들과 흥정하는 것도 녹록치 않다. 제수 구색 맞추는 게 올해는 여러모로 힘들다. 차례 상에 올릴 밥은 농협에서 조합원들에게 추석선물로 돌린 작년 산 농협 재고미로 지었다. 생협 한살림에 원료곡을 납품하던 주변 친환경 농가들도 재고로 남은 쌀을 되사는 웃픈(!) 일도 있다고 들었다.

으레 추석 차례상에는 귀한 햅쌀로 밥을 지어 조상께 바쳤다. 조생벼가 흔치 않던 그 이전 쌀 고개시절, 묵은쌀은 이미 동이 나 덜 여문 벼를 베어다가 쪄서 말린 다음 절구통에 찧어 챙이로 까불러 만든 올기쌀을 올리기도 했다. 옛 어른들의 수고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만큼 쌀은 귀했고 귀히 대접 받았다.

요즘 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다. 정부의 대책은 여태 쌀값 하락을 부추겼으니 대책이랄 것도 없다. 필자가 21년 전 첫 농사 지어 정부 공판에 낸 나락 값이 1등가 6440원이었다. 올해는 공공비축미 가격이 그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 숱해 애완견 사료 값도 못하느니 껌 값도 안 된다느니 아무리 뇌까려 봐도 사람들에겐 피부에 와 닿지 않자, 몇 해 전부턴 밥 한 공기 1000원 중에 생산자 농민 몫으로 300원을 보장하라는 말을 주로 한다. 여태 300원도 못 받았냐며 되묻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쌀값에 인색하다. 어쩌다 쌀값이 회복될라치면 폭등이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까지 동원하여 도시 소비자들의 물가불안을 조장하던 언론도 요즘엔 이렇다 저렇다 통 말이 없다. 밥 한 끼 300원이 부담스럽다는 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또한 밥상 물가 타령하며 농축산물을 가격상승 주범으로 몰며 눈을 흘기던 자들도 농사짓는데 필요한 생산 자재 중에 면세유가 50% 이상 오르고 비료 사료값이 폭등해 농민들이 아우성치는 건 애써 외면한다.

시인 강신용은 밥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세상 살아가는 데는 / 뭐니뭐니 해도 / 따뜻한 밥 한 그릇 먹는 일이 / 가장 큰 일이다 / 밥 한 그릇 나눠 먹을 수 있다면 / 거기가 천국이다.” 밥이 그야말로 찬밥 신세가 돼버린 요즘 세태 속에서 과연 공감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이 아무리 뒤틀리고 거꾸로 돌아도, 삶의 처음과 끝이자 우주 존재의 근본은 여전히 이다. 인류역사에서 이처럼 밥이 홀대받은 적이 있던가. 분명코 인류사의 위기다.

하늘도 갈수록 수상하다. 남쪽 먼 바다에서 연달아 태풍이 발생한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게 들려오는데 들녘은 아직 녹음이 남아있다. 지난번 힌남노 태풍을 겨우 견뎌 이겨낸 나락들이 이제 조금씩 여물이 들고는 있지만, 아침녘에 이슬의 무게도 버거워하는 녀석들인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침입자들을 경계하느라 잔뜩 긴장한 모습처럼 느껴져 안쓰럽기만 하다.

온전히 황금물결로 넘실대는 들녘에서 콤바인 탈곡기에 벼 낟알 쏟아지는 소리마냥 경쾌하고 풍성하게 가을날을 맞이하고픈 기대는, 화석시대만큼이나 오래된 기억으로 영영 박제되어 버리고 만 것일까. 기대감이 사라진 가을, 이 시대를 사는 농사꾼은 가을이 낯설고 두렵다.

이 글은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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