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숨겨진 이야기(10) 순창 토착성씨와 향리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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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숨겨진 이야기(10) 순창 토착성씨와 향리층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2.11.0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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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 시대 순창지역 주도한 토착성씨와 향리층

순창군민이 꼭 알아야 할 의미 있는 이야기, 또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순창 관련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사실 위주로 살펴봅니다.

 

순창 토착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순창지역 토착 성씨에 (), (), (), (), ()’ 씨 순으로 실려 있다. 이들 토성(土姓)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순창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향리(鄕吏) 집단이었다. 이들 순창지역 토성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호장(戶長)이나 이방(吏房) 등의 향리로 있으면서 때때로 중앙에 관료를 배출했다.

순창 설씨의 경우 고종 때 상서좌복사(2)와 형부상서(3)를 지낸 설신(薛愼), 그의 장남으로 충렬왕대에 첨의중찬(1)에 오른 설공검(薛公儉) 등을 배출했다. 설공검은 후에 순창 성황신으로 모셔진다.

순창 임씨에서는 충숙왕 때 주로 활약한 임중연(林仲沇)을 배출했다. 그는 첨의찬성사(2)에 오른 뒤 1326(충숙왕14)년 순창군(淳昌君)에 책봉되었다. 그는 탐욕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아들이 고려말 조선 건국에 저항한 두문동 선비들의 지도자격인 임선미(林先味)이다. 임선미는 개경에서 순창군 인계면 호계리로 우거했다.

옥천(순창) 조씨 계열에서는 충혜왕 때 밀직부사(2)에까지 오른 조렴(趙廉)과 공양왕 옹립에 큰 공을 세운 조원길(趙元吉) 등이 출세한 인물이었다.

옥천 옹씨는 족보에는 고려시대에 병부상서를 지냈다고 하는 옹의태(邕義泰), 이부상서를 지냈다고 하는 옹경성(邕慶星), 평장사겸병부상서를 지냈다고 하는 옹명정(邕命廷) 등이 있으나 고려사기록에서는 이들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순창 염씨에 대해서는 크게 참고할 만한 기록이 없다.

이들 토성(土姓) 중 일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쇠잔해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조선시대까지도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황대신사적>에도 명종·인조·영조·순조 때 향리 명단에 순창 설씨·조씨·임씨·옹씨 등이 호장이나 이방 등의 향리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성씨별 문과 급제자수

순창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수에서 전라북도에서는 전주 115, 남원 101명에 이어 세 번째인 총 44명을 배출한 지역이다.

순창지역 성씨별 문과 급제자 수를 살펴보면 조선 전기에는 대표적 순창 토착 성씨인 옥천조씨와 순창설씨가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여기에 이거 성씨인 고령신씨, 남원양씨, 강릉김씨가 사족(士族) 기반을 주도하고 있다.

 

조선 전기 향리 가문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추구했던 고려왕조는 건국 이래 신라 말기에 형성된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를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그 결과 지방세력은 호족으로서의 성격을 거의 잃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명령에 따라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향리층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향리(鄕吏)란 고려·조선 시대에 지방 관청의 행정실무를 처리하던 하급 관인계층을 이르는 용어로, 오늘날의 지방공무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읍치(邑治, 관아가 있는 곳, 읍내)에 세거(世居·대대로 삶)하며 노동력 징발, 조세 징수 등 각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한편, 중앙정부와 지역민 사이에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향촌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층이었다.

향리는 토착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세습되었다.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의 교체, 그리고 지방제도 정비 등 조선왕조의 중앙집권화 시책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부류들이 향리 집단에 편입한 사례는 드물다.

중앙정부에 대해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우두머리)과 지역사회에 중앙정부의 지시를 충실하게 실현할 것을 기대하는 이방(吏房·지방 관아의 육방 중 인사 관계 실무 담당) 등은 과거제도와 같은 합리적 절차를 거쳐 선발되지 않고 각 읍에서 역사적 연고권을 가진 향리 가문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선임되었다.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은 장기간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각 읍에서 읍권(邑權)을 행사하는 호장이나 이방 등 두 요임은 일부 향리 가문들이 거의 독점-안배했다. 조선 전기 이들 향리 가문 대부분이 토성 출신이다.

토성 임씨는 조선시대 호장이나 이방 등을 계속 배출했다. 토성인 조씨나 옹씨도 조선 전기에 중요 향리 가문이므로 조선 전기에는 토성 출신 향리들이 읍권을 주도한 셈이다.

같은 토성이 향리 가계와 사족(士族·선비 집안) 가계로 분화하면서도 같은 지역에 공존하기도 했다. 이것은 순창도 마찬가지다. 순창의 호(), (), (), (), (), () 등 여섯 토성 중 설씨, 옹씨, 임씨, 조씨 등의 경우 조선 전기에 향리만 아니라 동성 사족도 순창에 거주했다. 이 중 옹씨의 경우 호장의 아들인 옹몽신(邕夢辰)이 문과에 급제, 관직을 두루 맡으면서 후손은 사족이 된 반면 다른 친족들은 17세기 전반까지도 향리를 세습했다.

 

향리 가문 교체와 가계 분화

순창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토성 출신으로 구성된 동질적인 집단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비토성 출신 향리 가문들의 비중이 커졌다. 조선 후기에는 조씨와 옹씨가 보이지 않고 대신 전주 이씨와 초계 최씨 그리고 창녕 조씨 등이 새로운 향리 가문으로 등장한다. 토성 설씨는 조선 후기에 율생(가리, 관아의 임시직)으로 나온다.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 전기 순창 향리 사회를 이끌던 임(((() 네 토성 중 옥천 조씨는 임진왜란 이후 자취를 감추고, 옹씨는 17세기 전반까지 감영 영리 등 요임(要任·중요한 임무)을 배출한 것을 마지막으로 향리를 찾을 수 없다. 설씨는 임진왜란 이후에는 율생만 확인된다. 설씨는 향반(鄕班·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여러 대 동안 벼슬을 못하던 양반) 설씨도 있는데, 향반 설씨는 순창군 금과면에 세거했다.

반면 초계 최씨(草溪 崔氏), 전주 이씨(全州 李氏), 창년 조씨(昌寧 曺氏) 등이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향리 가문으로 등장했다. 16339월의 성황사 현판 개간을 주도한 삼공형(三公兄, 각 고을의 호장·이방·부호장 또는 부이방) 중 이방과 부이방은 초계 최씨가, 호장은 토성 출신인 임씨가 맡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보이지 않던 초계 최씨가 17세기 이후 빠른 기간에 주요 향리 가문으로 성장한 것이다. 초계 최씨는 이 무렵 전라도 감영 영리도 배출했다.

또 다른 주요 향리 가문인 창녕 조씨나 전주 이씨는 1633년의 현판에는 나오지 않으나, 창녕 조씨는 1743년에 이방과 기문 작성자로, 전주 이씨는 같은 항렬자를 사용하는 5인이 호방 등 주요 직책자로 나온다. 이어 이들은 요임을 계속 배출하는데, 이로 미루어 17세기 후반 이전에 향리 가문으로서 위상을 굳혔을 것이다.

새로 등장한 세 가문의 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들이 토성 출신 임씨 향리 가문과 더불어 주요 향리를 차지하면서 읍권을 독점-안배하는 구조는 20세기 초까지 거의 300년 이어졌다.

순창 향리사회는 왕조 교체에도 이렇다 할 변동이 없었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향리 가문들이 대거 교체되는 가운데 임씨만이 고려 이후 한말까지 유력한 향리 가문으로 위상을 견지했다.

 

가계 분화와 주도 가계의 성장

1743년에 작성한 <성황대신사적>을 보면 이 무렵 각 향리 가문에서 가계 분화와 더불어 일부 가계들이 읍권을 독점-안배하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씨 향리의 경우 이것은 뚜렷하다. 일곱 가계 중 두 가계에서 중요한 인물이 집중적으로 배출된 것이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전후 활동한 임득린(1586~1627)의 세 아들 임명룡(1606~1648), 임업룡(1609~1674), 임후룡(1612~1680) 중 임명룡과 임업룡의 후손들이 주로 직책을 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임명룡의 세 아들 중 주로 차남 임우청(1630~1694)의 후손들이, 임업룡의 경우 네 아들 중 장남 임백청(1620~1700)의 후손들이 호장이나 이방을 비롯한 유력자를 다수 배출했다. 근현대기에도 주요 엘리트들이 이들 가계에서 집중적으로 배출된다. 3·4·6(비례)대 국회의원 임차주(林次周·1918~1996)는 임우청 8대손이다.

 

율생(가리)의 증가

지방 이서 중 비향리 출신은 율생(律生), 또는 임시 이서(아전)라는 의미로 가리(假吏)라고도 통칭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행정에 공백이 생기자 이를 계기로 인원이 크게 늘지만, 하급 직책만 맡았다. 옥천군지(1760)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순창지역 향리는 12, 율생(가리)48명이었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율생을 세습하는 가문도 출현했다. 율생이 점차 복잡한 행정 업무를 처리할 능력과 문해력을 가지면서, 이 중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사회적 성취를 이룩한 인물도 있었다. 순창의 경우 오랫동안 율생에 머물렀던 천안(또는 전주) 전씨 율생 가문에서 1905년에 전운태(全雲台)가 호장에 오른 것도 그 일환이다. (<순창 좌부 천안 전씨 가문 전승 고문서>, 순창장류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읍치 성황제의 이원성과 순창의 향리 사회, 그리고 이들의 역사 서사로서 성 황대신사적기>(이훈상 동아대 사학과 명예교수), <고려시대 순창의 지방세력과 성황신앙>(김갑동 원광대 국사학과 교수), 옥천군지(1760), 세종실록지리지(순창군편)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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