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균태] 통일신라 설총 선생 성균관 배향 1000년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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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균태] 통일신라 설총 선생 성균관 배향 1000년에 즈음하여
  • 설균태
  • 승인 2022.11.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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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총 선생의 삶을 다시 성찰해봅니다
재경문학회(財經文學會) 회장 설균태

 

 

성균관 문묘봉안 1000주년 행사

 

설총 선생은 신라가 배출한 뛰어난 문장가이며 우리나라 유학의 종주(宗主)입니다. 고려 현종 때 성균관에 문묘 배향한 이후 금년이 1000년이 되는 해로 동국 18(東國十八賢)의 으뜸이신 설총 선생을 기리는 뜻깊은 기념행사가 정부의 국고지원으로 다채롭게 이루어졌습니다.

 

(1)기념행사

지난 달 25일 오전10시부터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에서 정부 요인들과 성균관장을 비롯한 전국 유림들 그리고 경주순창설씨 대종회 회장을 비롯한 종친들 및 일반 시민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문묘봉안 천년기념 헌작례(獻酌禮)와 성균관장의 기념사와 내빈들의 축사로 이어지는 기념행사가 성황리에 거행되었습니다.

 

(2)기념공연

문묘 제례악 공연에서는 도창(導唱)에 따라 정가(正歌) 시조와 가사로 청산리’,‘태평가7곡을 선보여 관객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경기시나위 오케스트라 연주단에 의한 문묘제례악 연주가 있었고 성균관대 팔일무단에서 연출한 문묘일무(文廟佾舞) 공연이 있어 참석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3)알성시(謁聖試) 시조 백일장 본선 대회

시조백일장은 예선을 거쳐 전국에서 33명이 본선에 진출하여 설총 선생과 유학사상이란 주제로 각 참가자가 작성한 시조를 심사한 결과 가작 24, 은상(探花) 5, 금상(榜眼) 3, 장원 1인등 훈격별로 수상자 33명이 선정되었습니다.

 

(4)학술대회

지난달 27일 오후2시부터 경산 삼성현(三聖賢) 역사문화관에서 성균관 관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 유림, 경주순창 설씨 종친들 및 일반 참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대학 이동근 교수의 <홍유후 선생 실기 설화의 유형과 캐릭터적 성격>에 대한 발표, 대구대학 정호완 교수의 설총 선생의 공적과 발전 방안에 대한 발표, 경북대학 백두현 교수의 <차차 표기법의 발달과 설총>에 대한 발표, 성균관대학 안대희 교수의 <설총의 유학자 성격과 화왕계의 해석>에 대한 발표, 세명대학 이창식교수의 <‘화왕계의 풍자문학>에 대한 발표와 대구대학 김종국 교수의 <설총 어머니와 한국의 어머니상 비교>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어 각 발표자에 대한 토론이 오후 6시 가까이 이어져 설총 선생의 삶과 공적에 대해 심도 있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5)설총 선생 유적지 답사

경주에서 1박한 전국 유림 일행과 설씨 종친들은 28일 오전에 설총 선생과 김유신 장군 및 최치원 선생을 모시는 서악서원(西嶽書院)을 알묘(謁廟)하고 보문단지에 있는 설총 선생 묘를 참배하였습니다.

 

(6)홍유후 설총선생 실기(實紀)편찬

설총 선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이외에도 1912년 순창설씨 임자보(壬子譜)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홍유후 실기목록(實紀目錄)에 근거하여 설총 선생의 역사적 유적(遺蹟)을 집대성한 설총 선생 실기(實紀)2022년 말 이전에 발행할 예정입니다.

 

 

설총 선생의 출생과 성장 과정

 

(1)출생

설총 선생은 원효대사와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 사이에서 무열왕 5(658)년에 태어났습니다. 요석공주는 본래 김흠운(金欽運)과 혼인하였으나 백제와의 전쟁에서 사망하고 과부 공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원효대사가 저잣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무열왕이 필시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얻고자 한다는 뜻으로 알아채고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유인하여 오게 하는 도중 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게 되어 관리들이 원효대사를 물에서 건져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 젖은 옷을 말리면서 요석궁에 머무르게 되어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분은 인연을 맺은 후 남악산에 들어가 백일기도를 드렸고, 그 후 요석공주는 태기가 있게 되었습니다. 갓 태어난 설총이 골격이 맑고 빼어나자 원효는 목을 어루만지면서 이 아이는 천인(天人)이 내려온 것이 분명하니 이름을 ()이라 하자고 하였다고 합니다.

 

(2)성장 과정

설총은 어려서부터 장차 나라에 크게 기여할 면모를 보였는데 나이 10세에 이르자 얼굴이 거인 같았으며 지혜롭고 사려가 깊고 원대하였으며 뛰어난 용모는 군자의 기량이 엿 보였다고 합니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출가했으니 어린 설총은 홀어머니 요석공주의 지극 정성의 보살핌으로 성장했다 하겠습니다.

요석공주는 하늘이 나를 은밀히 도와 영특한 아들을 얻어 뛰어남(超倫拔華·초륜발화)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빛을 일으킬 보배로운 자식(興光寶駒·흥광보구)이다. 이에 나는 더욱 정성을 다하여 이 아들로 하여금 만년에 반드시 영광과 부귀를 향유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애지중지 훈육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석공주의 자식 훈육은 외유내강형이었고 어릴 때부터 인격적으로 대하였고 아들 총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합니다.

하루는 책을 읽고 있는 총에게 그리운 아버지 모습을 그리며 며칠 후 법회에 함께 가자고 제의 했으나 총이 아버님의 대승기신론을 다 읽고 난 후에 뵙도록 하겠다고 거절했을 때도 요석공주는 설총의 의견을 수용하였다고 합니다.

설총 선생이 불문(佛門)을 떠나서 유학의 길을 택하게 된 동기는 소요산 자재암에서 정진하고 있던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에게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었다고 보입니다.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을 데리고 아버지 원효대사가 기거하고 있는 자재암 가까운 곳에 공주궁을 짓고 남편 원효의 안위를 기원하면서 칩거하였는데 하루는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합니다. “나는 소요산에 산신이 되어 속세로 향하는 발이 없어 내려가지 못하니 아들을 데리고 돌아가시오.” 이 편지를 받고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요석궁으로 돌아 왔다고 합니다. 그 후 아들에게 불문(佛門)보다는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유학을 권하게 되었고, 아들 설총도 요석공주의 뜻에 따라 유학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설총 선생의 공적(功績)=유덕(遺德)

 

(1)구경(九經)의 도입

설총 선생이 신문왕 때 백의정륜학사(白衣正輪學士)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중국의 천자가 구경을 꺼내어 보이며 신라에도 구경이 있느냐고 물어서 없다고 하면서 한 질을 선사해주기를 청하였으나 천자가 허락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빌려서 하룻밤 사이에 열람한 후 모두 암기하여 귀국한 다음 편찬하여 우리말로 후생들을 깨우쳤다고 하니 그 총명함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구경은 희경(羲經) ·, 서전(書傳) 6, 중용 1으로 구성 되었는데, 여기서 희경(羲經)은 주역(周易)을 말합니다.

 

 

(2)유학의 종주(宗主)

설총 선생은 중국의 구경을 도입하여 최초로 우리말로 풀어 유생들에게 교육시켰을 뿐 아니라 신라 신문왕때 중국의 국자감(國子監)을 본 따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변경하여 국학(國學)을 창설하여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였습니다. 유교를 보급함과 아울러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에 관원으로 등용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교육기관의 틀을 잡아주었으니 이를 근거로 고려 현종때 유학의 宗主로 추앙되어 그때부터 성균관에 봉안되셨습니다.

 

(3) 이두의 표준화 및 집대성

한자의 소리체계와 우리말이 서로 달라서 우리말에 알맞은 표기체계가 필요했고 이렇게 해서 한자를 우리말로 적을 수 있도록 설총 선생이 이두를 표준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자의 소리를 빌려 쓰되 우리말 순서에 따라서 적고 한자의 뜻()과 소리()를 활용함으로써 일반 백성들이 편리하게 문자 생활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이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인 15세기까지 한자와 함께 사용되었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이두가 디딤돌이 되었으리라 보입니다.

 

(4) 신하로서의 충성심

설총 선생은 신문왕 때 여진족의 난이 있자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여진기도위병마도원수(女眞騎都尉兵馬都元帥)로 임명되어 난을 평정하여 신라의 위상을 빛냈던 문무(文武) 겸비 충신이었습니다. 왕이 왕도정치를 펼칠 수 있는 길은 충신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충언을 했으며 <화왕계>를 지어 우회적으로 직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설총 선생은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어전에서의 예절과 주의(奏議)의 방법 그리고 기민(饑民·굶주린 백성), 환과(鰥寡·홀아비와 과부), 병자(病者)를 구휼해야 한다는 점을 주상(奏上)한 것으로 보아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중요시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5)화왕계(花王戒)와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

 

()화왕계

화왕계는 삼국사기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신라 신문왕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설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부탁하였고, 설총은 그 자리에서 <화왕계>를 들려주었습니다. <화왕계>는 간신(장미)은 멀리하고 충신(할미꽃)을 가까이하라는 창작 한문 소설입니다. 설총 선생은 우화를 통해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해야 나라가 바로 서고 향락과 사치를 멀리하며 도덕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설총의 의도를 깨달은 신문왕은 설총 선생을 가까이 두고 높이 등용 하였으며 신문왕은 후세의 임금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글로 남기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

지금까지 설총 선생이 지은 저서로는 <화왕계>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경주 감산사에 있는 미륵보살입상조상기와 아미타여래조상기가 왕명을 받아 설총 선생이 글을 지었다는 자료가 나와서 새로운 사료(史料)로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奈麻聰撰奉敎).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은 신라시대 아찬으로 있던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사 절을 짓고 부모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불상이라고 하며 현재는 국립박물관에 국보 제81호와 국보 제82호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 설총 선생은 그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지만 통일 신라초기에 문무를 겸비한 충신으로 통일신라가 왕도정치의 기틀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원효를 기리며 분황사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생을 마감(89·746)할 때까지 사모하고 공경한 점, 그리고 어머니 요석공주의 의견을 존중하여 유교를 선택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지극한 효심을 지닌 효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서 우리나라 유학의 효시(嚆矢)가 되었으며, 이두를 표준화 집대성하여 한자를 우리말로 풀어 백성들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데도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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