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책임을 면하려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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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책임을 면하려는 정부
  • 문정주 의사
  • 승인 2023.02.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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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저자

우리 땅에 서양의학은 19세기 국가에 의해 도입되었다. 쇄국 끝에 개항한 조선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또한 의학을 받아들였다. 1885년에 서양식 의료기관인 국립 제중원을 설립했고 1899년에는 수도 한성에 의학교를 개교했다. 이어 지방 각지에도 관립 의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려 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 곳곳에 국공립 의과대학에서 의사가 양성되고 전국 어디서나 공공병원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나라에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으로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일제가 주요 도시 여러 곳에 자혜의원 등 관립 의료기관을 세우기는 했으나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에 위치한 이 시설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을 위한 의료기관일 뿐이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경성의전, 평양의전, 대구의전 등 관립 의학교에서는 입학 단계부터 조선인을 차별하고 일본인 위주로 학생을 선발해 조선인 의사 배출은 적은 숫자로 억제되었다.

해방과 함께 드디어 우리 손으로 의료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으나 곧이어 벌어진 남북분단과 미군정, 게다가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우리를 좌절케 했다. 의사를 늘리고 공공의료를 강화할 기회는 또다시 사라졌다.

한편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임시정부는 의료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보았다. ‘농인과 공인의 무상의료를 널리 시행함이 포함된 건국 강령이 이를 증명한다. 삼균주의. 즉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 완전 균등을 선언하는 평등주의를 토대로 한 이 강령에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해 균등 사회를 실현할 방안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계승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의료시설과 의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의료 국영론은 시기상조라 주장하며(보건후생부 초대 장관 이용설, 1947) 공공의료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스스로 면하려 했다. 이 논리는 민간이 종합병원을 많이 설립하고 미국의 보건행정을 배울 것이라며 미국 정책을 추종하는 빌미로도 이용되었다. 이른바 자유방임 의료제도의 시작, 시장에 의료를 맡기는 정책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어언 75년이 지났으나 정부의 책임 외면, 과도한 미국 편향에는 달라진 게 없다. 의료보험을 도입할 때도, 부실한 보험을 보완할 때도, 건강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자기 역할을 보험료 징수와 재정 관리에 한정할 뿐 의료 공급에는 소극적인 역할에만 머물렀다.

공공의료를 확대해야 할 시점에 정부가 선택한 것은 언제나 사립병원의 확대, 의료 시장의 팽창이었다. 민간에 저리 융자금, 정책 지원금을 제공해 병원 설립과 확장을 부추겼고 진료에 비급여 항목을 허용해 건강보험의 통제 밖에서 돈이 되는 진료가 가능하게 했다. 병원이 전공의를 고용해 수련을 명목으로 장시간 노동하게 하는 것도 용인해 경영 이익을 높여 주었다. 그 결과 사립병원이 한없이 많아지고 규모도 커졌다. 지금 전국 병상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데 이르렀으니 사립병원은 그야말로 의료계의 주류이며 시장의 지배 세력이다.

일부 사립병원, 특히 대규모 시설을 갖추게 된 병원들은 단순히 병원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대학병원의 자리에 올랐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 무엇이든 속내는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있다. 대학병원이 되면 전문의 고용이 훨씬 쉬워져 타 병원과 경쟁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제 전국 40개 의과대학 중 절대다수인 30개가 사립이다.

소유냐, 기능이냐.” 2008년 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정부 회의장에서 숱하게 듣던 말이다. 공공의료 강화 정책을 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를 비난하는, 대개는 사립병원에 소속된 사람들이 주로 그 말을 꺼냈다.

참여정부가 짜 놓은 2008년 예산에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지방 대학병원 지원금이 있었다. 종부세로 걷은 돈을 활용한 유례없이 큰 액수였다. 참여정부였다면 당연히 지방 국립대병원 중에 몇 곳을 선발 지원해 공공의료 강화를 추진했을 테지만, 시장만능주의를 내세우며 당선된 새 대통령은 생각이 다른 듯했고 사립대병원들도 그걸 간파하고 있었다. 그 병원들 눈에 그 돈은 규모를 키울 기회, 시장에서 자기 지위를 높일 도약의 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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