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3.1운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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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3.1운동 이야기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3.02.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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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191931일을 기점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해 일어난 항일만세운동이자,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더불어 일제 식민주의의 경험을 딛고 수립된 대한민국의 기원(起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자료와 최근까지 연구·발표된 내용을 바탕으로 순창지역 3.1운동을 살펴보았다.

 

독립선언서 전달과 배포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으나 일제의 무력진입을 염려해 인사동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각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서울역·이화학당·서대문 등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이 전국으로 확대된 3.1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3.1운동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독립선언서 배포였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했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했다. 민족대표로 서명한 이종일의 책임 아래 모두 21000매 정도가 인쇄되었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당시 이종일의 경운동 집에 보관되었다가 독립선언서 배포 총책임은 천도교의 오세창이 맡고, 이종일은 오세창의 지시대로 청색의 종이조각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해주었다.

독립선언서 배포는 천도교·기독교·불교계 인사와 학생 등으로 나누어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주로 경성 시내에서 배포를 맡기로 하고 각 지방의 독립선언서 배포는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등에서 각각 책임자를 정해 각각의 종교 조직을 통해 배포했다.

 

전북지역 3 1운동

전북지역에서의 3.1 운동은 하루 뒤인 32일부터 본격화됐다. 전날 서울에서 출발했던 독립선언서가 도착하면서 군산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전북지역 3.1운동의 특징은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날을 이용한 시위가 주를 이루었으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전북지역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지역이었던 만큼 천도교는 3.1운동 직전까지 전주·익산·임실 등지에 지방 종리원(宗理院·천도교 행정사무기관)이 잘 갖춰져 있었다. 이러한 조직체계는 당시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연락책임을 맡은 교인들로 하여금 독립선언서 배포와 만세시위의 소식 전파를 일사불란하면서도 빠르게 확산될 수 있도록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주로 전주 신흥학교·기전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등의 학교를 통해 도내 주요 도시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와 함께 일반학교 학생들의 조직적 참여와 군중의 자발적 참여도 전북지역 3.1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순창 천도교구와 최규홍

3.1운동 당시 순창 천도교구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천도교 순창 교구장(敎區長) 최규홍(崔圭弘)은 특별 성미금(誠米金)으로 모은 금() 60()을 교도 김재근을 통해 1919421일 천도교 중앙총부에 전달했다가 김재근이 체포되어 취조 받은 사실이 확인된다.

최규홍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대한국민회에 가입해 인천·전주 등으로 가서 군자금 모집을 했으나 공소사실 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순창에서 순창옹호동맹, 신간회 간사 등의 활동을 지속했다.

 

313일부터 시작된 순창 3.1운동

순창에서 3.1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 가장 빠른 일자는 313일이다. 상세한 운동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익산·전주·임실과 함께 13일에 시위운동이 있었음을 191999일자 독립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창의 3.1운동도 전국 여러 지역과 마찬가지로 3월에서 5월까지 집중되었다. 순창의 만세 운동은 박동진 등의 청년·학생들과 천도교계의 역할이 컸다.

 

애국청년 박동진의 만세시위 계획

순창면 순화리 출신의 애국청년 박동진(朴東鎭·1899.3.91954.6.23)3월 초 서울·평양·전주 등지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순창읍 장날을 이용해 순창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조선 독립국 만세’ ‘조선 독립국 독립 만세등의 문구를 종이에 크게 써서 317일 새벽 순창군청·순창헌병분견소·순창학교조합 앞 게시판 등에 붙여 전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일제 헌병대 등의 경비가 삼엄했기 때문에 장날 거사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박동진은 426일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또 진행했다. 424일 자택에서 “426일 순창 장날에 순창 군민은 20세부터 50세까지 전부 집합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독립 만세를 외치자. 만일 만세를 부르다가 죽더라도 이후 우리 외의 독립을 계획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안심하고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을 쓴 종이 한 장과 “426일은 독립 만세를 부르자. 조선인을 죽이려면 죽여라. 우리들이 죽어도 마침내 독립을 도모할 자가 5000만 명이 있으니 죽일 터이면 죽여라라는 글을 쓴 종이 한 장을 작성해 425일 새벽 1시경 전자는 순창면사무소 게시판에, 후자는 게시판 부근 돌담에 붙여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 날의 계획 역시 일제의 무력 경계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격문을 작성해 붙였던 박동진은 일제에 검속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박동진이 유등면 게시판에 붙여 놓은 격문을 유등면장이 발견하고 511일 순창 헌병분견소와 수비대에 보고해 체포되었던 것 같다.

 

금산에 울려퍼진 독립만세

320, 순창읍 금산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시작됐다. 밤이 되어 일제의 경계가 풀어진 틈을 타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군민 약 200명이 비밀연락으로 순창읍 금산에 모였다. 그리고 준비했던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야간의 정적을 깨뜨리는 감격적인 만세소리는 금산에서 읍내로, 군민들의 가슴 속으로 메아리 쳤다. 헌병대의 수색작전에 의해 구속당한 노병화(盧炳華) 10여 명의 천도교인들은 일제의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항변하며 대한국민으로서의 기백을 보여주었다.

 

정순환·우치홍의 활동

순창군 만세운동과 관련해 박동진 외에도 여러 청년들의 활동이 있었다.

순창읍 남계리 출신 정순환(鄭順煥)411일 순창 장날의 만세 시위를 독려하는 광고문을 작성해 새벽에 순창시장 서남부의 우육(牛肉) 판매점 담에 붙였다. 광고문에는 음력 311(411) 시장 백성은 일심으로 힘을 모아 만세 외치기를 바라며, 헌병이 출장 와도 그치지 말고 모두 일어나 죽을 때까지 만세를 부르자라고 적혀 있었다 한다. -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판결문·1919.8.2.

411일 장날 순창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던 사실은 조선소요사건 관계서류(1)·(7) 등 여러 문건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외에도 425일과 511일 순창에서 격문이 배포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순창 접주로 활동했던 동암(東菴) 우동원(禹棟源)의 차남인 우치홍은 당시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다. 31일에 탑골공원 3.1선언식에 참가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37일에는 천도교 총부(總部)에서 독립선언서 200장과 <독립신문> 150장을 가지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리역에서 내려 도보로 전주·무주·진안·임실 등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천도교구실과 지사들의 집을 찾아 순창으로 들어오던 중 인계면 쌍암리에서 미행해 온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511일 순창군에 배포된 격문

독립만세를 부르짖을 것을 널리 알림(呼獨立萬歲注意廣告·호독립만세주의광고)

슬프도다! 경술년 합방 이후 항상 북받치는 마음을 품고 곳곳에서 통곡하였으나 저 도적들의 모질고 억센 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10여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다행히 하늘께서 살펴주시고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좋은 희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오랜 가뭄에 비를 만난 것과도 같고 아이가 어머니를 본 것과도 같다.

사람이라면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싶은 마음은 누군들 없겠는가? 저 도적들이 지금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이 나라의 백성이라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달 14일에 산꼭대기에 모여서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면서 태평한 세상이 올 것을 축원하고, 다시는 저 흉악한 놈들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이를 간절하게 널리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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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에서 제멋대로 이 광고를 붙어두거나 떼는 짓을 하지 말라.

 

타지에서 활동한 순창인

쌍치면 금평리 출신 송광춘(宋光春·1897~?)1919310일 오후 3시경 광주 부동교(광주 동구 불로동과 남구 사동을 잇는 다리) 아래 작은 장터에서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교사·학생·주민 10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가담자 대부분이 체포되었고, 시위에 참여한 송광춘은 징역 10월형을 받았다. 송광춘은 100여 년 만인 지난 2022년 에 경남 하동의 재야사학자 정재상 씨의 노력으로 건국훈장(애족장)을 받게 되었다.

원적이 순창읍인 정홍모 청년은 남원공립보통학교에 부훈도로 있으면서 시민과 생도들에게 틈 있는 대로 독립운동을 격려했으며, 아동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래를 전파하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아래 문헌의 글과 사진을 인용하였습니다.

1. 순창의 민족독립운동사, 나종우천지명, 순창문화원, 2020.

2. <전북지역 3·1운동 행정기록물의 온라인 전시 방안 연구>, 홍석천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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