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쪽빛한쪽(19)그 시절은 아름다웠나
상태바
속쪽빛한쪽(19)그 시절은 아름다웠나
  • 선산곡 작가
  • 승인 2023.04.26 08: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산곡 작가

 

오랜만에 펴본 전화기 대화방에 미확인 숫자가 쌓여 있다. 그 중 수도권에 사는 중학교 동창 대화방은 평소처럼 두 자릿수로 넘쳐 있다. 몇 달 전 대화방 관리자인 친구에게 초대되었지만 참여는 하지 않았다. ‘나가기를 하지 않고 문자 마디를 훔쳐보는 정도였는데 그래도 얼마 전 먼저 전화해준 한 친구가 있었다.

공납금, 출석정지, 담임선생님, 교복 등등 대화 중에 나온 단어들이었지만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중간고사를 치르지 못하고 교실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회비미납자들. 아카시나무 그늘에 앉아 햇살 하얗게 펼쳐진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았던 그 공동의 추억이 과연 아름다운 것인가. 생각해 보면 자존심을 배우기도 전에 아픔의 피부터 철철 흘렸던 시기였다.

회상의 틈이 먼 탓인지는 몰라도 그 무렵의 일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 게 이상하다. 초등학교 시절은 어느 정도 또렷한데 중학 시절은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또박또박 썼던 일기를 다시 보아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처럼 대부분이 생소한 느낌이었다. 아름다웠건 즐거웠건 웬만한 추억거리는 커다란 상처 아래 묻혀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화방에 한 친구의 이름이 눈에 머문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그해, 여럿 어울려 만난 날은 늦은 겨울이었다. 수재였던 그는 우리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생 신분이었다. 함께 걷던 그가 비키(Vicky Leandros)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노래가 내 가슴을 시리게 한 것은 차가웠던 겨울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그 무망(無望)의 현실에서 산모퉁이의 잔설을 바라보던 나는 곧 있을 입대(入隊) 시기를 셈하고 있었다.

 

“White house joy will disappear, What became of yester year(하얀 집의 기쁨은 사라지고, 다 옛날 일이 되었네).”

 

지금을 위하여 50여 년 전 그는 그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모른다. 외국에서 산다는 그가 일시 귀국했다는 내용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내 마음에 달린 추()는 생각보다 무겁다.

입대도 함께 했던 다른 한 친구는 목회자가 되어 이젠 은퇴했다고 한다. 소총을 멘 채 빈총도 안 맞는 게 낫다는 말을 자주 했던 그 목사님이 대화방에 올린 글들은 잠언(箴言)처럼 늘 길었다. 살아온 걸음이 제각각, 그래도 분기별로 만나 회포도 푼다는 그들이 서로의 이름 뒤에 적는 형제라는 칭호가 문득 낯설기만 하다.

사연을 띄우고 맞장구를 치고 격려하는 그 틈바구니에 낄 용기는 접어 둔 채 이어보는 세월의 틈이 너무 멀다. 대화방 사용법이 아직도(?) 미숙한 탓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핑계다. 광장(廣場)의 자리는 비좁지는 않았을 텐데 내 한 걸음 내디딜 보폭이 이렇게 짧을 줄 미처 몰랐다. 과연 그 시절은 아름다웠나.

4월이 가고 있다. 지난 시절의 사월, 낙화(落花)는 차라리 아름다웠지. 다만 처절했다는 것이 가슴에 남아있지만.

선산곡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순창 농부]순창군창업유통연구회 변수기 회장, 임하수 총무
  • 최순삼 순창여중 교장 정년퇴임
  • 선거구 획정안 확정 남원·순창·임실·장수
  • 순창시니어클럽 이호 관장 “노인 일자리 발굴 적극 노력”
  • 군 전체 초·중·고 학생 2000명대 무너졌다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