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숨겨진이야기(16)순창에 이야기 남긴 유명인사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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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숨겨진이야기(16)순창에 이야기 남긴 유명인사들③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4.06.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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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민이 알아두면 의미 있는 이야기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순창 관련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사실 위주로 살펴봅니다.

 

 

김집(金集기호학파 형성에 기여한 문신·학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 1656)은 조선 후기 이조판서·좌참찬·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이며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다. 이이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아버지 김장생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역할을 했다.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며 순창을 순시했을 때 강천산 월연대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어젯밤 비를 바람이 몰아가고

가벼운 그늘이 동구를 막고 있네.

깊은 산 가을은 깊어지고

땅이 갈라졌는지 누대는 멀기도 하네.

기대에 찬 중천의 학이런가.

무심히 산을 넘는 구름이런가.

속세 인연 잊은 지 이미 오래라서

새와도 짐승과도 잘 어울린다네.

風捲前宵雨/輕陰鎖洞門/山深秋欲老/臺迥地疑分/有待中天鶴/無心出峀雲/塵機忘已久/鳥獸可同群

-신독재전서1

 

 

송시열(宋時烈조선후기 성리학자·노론 영수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관수당 마롱암 암각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 1689)은 학문과 정치가 하나로 결합된 조선 후기를 상징하는 학자이자 정치가로 노론(老論) 영수이다. 그의 영향력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300년 동안 이어질 정도로 조선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3000번 가까이 언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는다. 송시열에게는 공자나 맹자처럼 ’()자를 붙여 송자’(宋子)라고 까지 불린 대학자이자 정치가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사대부 이익에만 매달려 역사의 흐름을 예견하지 못한 채 조선의 발전을 저해한 봉건주의자이자 당쟁의 화신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행사한 영향력이 백성의 삶과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느냐는 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거리다.

송시열의 아우 송시걸(宋時杰)이 순창군수로 재임(1672~1675)한 적이 있는데, 송시열은 이때 순창을 방문해 여러 흔적을 남겼다.

쌍치면 종곡리 종곡마을에 현재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관수재(觀水齋)가 있다. 이곳은 원래는 송시열의 제자인 농암(礱巖) 김택삼(金宅三·16191703)이 지어 유유자적하며 지냈던 곳으로 원래 명칭은 관수당(觀水堂)이었다.

관수재 뒤편 바위에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관수당 마롱암 암각서(觀水堂 磨礱巖 巖刻書)라고 부르고 있다. 부안 김씨 선산 입구 야산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 가운데 높이 2m, 지름 4m 정도의 큰 바위 전면에 글씨를 새겨 놓았다. 글씨를 새긴 부분은 지상에서 150부근이며, 글씨의 크기는 세로 50, 가로 240정도의 대자에 속한다.

관수당 마롱암(觀水堂磨礱巖)’이라고 행서로 새겨져 있으며, ‘우암 서(尤庵書)’라고 되어 있어 송시열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관수당 마롱암 암각서는 송시열의 글씨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활달하고 기백이 있는 후기의 필치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송시열이 김택삼을 방문하고 써 준 것이라고 한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여암유고(旅菴遺稿)<교용정 중건기>(敎用亭重建記)가 전한다. 고을 수령이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세운 누정으로, 명칭 변경과 중건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문에 의하면, 1655(효종 6) 고을 수령 이산뢰(李山賚·재임기간 1655.2159.12)가 관덕정(觀德亭)이란 이름으로 순창읍 대교천(경천) 변에 처음 세운 뒤 1672(현종 13) 군수 송시걸재임기간 1672.71675.2)이 중건했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교용정(敎用亭)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송시열이 쓴 시도 옥천군지(1760)에 전한다.

백방산 아래 낙재구가 있는데

노년을 즐기며 이곳에 놀았네.

진퇴를 시종 깨끗이 하려고

만고의 맑은 바람 낚시질로 늙어가네.

栢芳山下樂哉丘/湛老當年此所遊/出處去終氷一般/淸風萬古迂羊裘

-옥천군지

 

 

정약용(丁若鏞·17621836)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 경세유표·목민심서·여유당전서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정조 재위 때는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해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어느 날인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순창을 방문해 순창동헌 앞 응향각에 올라 그윽한 감흥을 풀어냈다.

 

<등순창지각>(登淳昌池閣·순창 못가의 누각에 올라)

대숲 속에 단청한 누각이 있는데

버드나무 물가엔 붉은 놀잇배

모래톱이 따스해 물오리 졸고

마름이 움직이자 고기 헤엄쳐

큰 읍이라 거두는 세금이 많아

부잣집엔 풍악을 즐겨 노는데

술잔 따라 돌리는 나이 어린 기생

치맛자락 연달아 펄럭이누나.

綵閣脩篁裏/紅船臥柳邊/沙暄容鴨睡/藻動任魚穿/大邑饒租賦/豪家嗜管絃/傳觴有小妓/裙帶自翩翩

- 다산시문집1

 

이세보(李世輔<순창팔경가> 지은 조선시대 최다 시조작가

이세보(李世輔·18321895)는 조선 말기 왕족(조선 25대 철종의 사촌동생)이자 공조판서·형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고, 시조 작가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혼미했던 철종 때 종친으로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함께 조정에서 가장 뚜렷한 인물이었다. 풍아(風雅시가(詩歌) 등의 시조집이 있고, 458수의 시조를 썼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시조를 지은 인물이다.

1860(철종 11) 아버지 이단화(李端和)가 순창군수로 있을 때, 순창을 유람하면서 지은 <순창팔경가>가 있다. <순창팔경가>는 그가 순창에 머물던 29세였던 1860년 초봄부터 초겨울까지 유람한 내용과 정서를 담고 있다. (1)금산, (2)헌납바위(금산저수지 아래), (3)대숲동, (4)응향지(凝香池), (5)아미산, (6)귀래정, (7)장대(將臺), (8)적성강이다.

이외에도 응향각, 화방재 등의 누정에서 노래한 순창 관련 시조가 남아 있고, 순창·순천·화순 지방 등을 유람하면서 쓴 가사 작품 <상사별곡>(相思別曲)이 있다.

이세보는 순창에 머무는 동안 순창고추장에도 푹 빠졌던 듯 싶다. 김건우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지난 2018년 모 일간지에 당시 충북 보은에 거주하던 이세보가 1868(고종 5) 118일에 순창군 인계면 마동(현재 마흘리) 전주이씨 집안에 보낸 편지 내용 일부를 공개했다. 이세보는 새해 안부를 묻고서 보낸 준 고추장에 감사드리며 보은에는 고춧가루를 구하기 매우 어려우니 꼭 보내주고 값은 편지로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고추장(古秋醬)을 먼 이곳까지 보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야 어찌 물품에 있겠습니까. 더욱 두터운 성의가 많아 감격스럽습니다. 언제쯤 왕림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극히 구하기 어려운 물품은 고춧가루입니다. 부디 몇 말을 구해 보내 주십시오. 값은 편지로 알려주시면 즉시 갚겠습니다. 잊지 마시고 각별히 주선해주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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