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인연의끈 41회-정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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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인연의끈 41회-정문섭
  • 정문섭 박사
  • 승인 2024.06.0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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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이 고향 남원을 떠나온 지 몇 년이 되었지만, 남로당 총책 박헌영을 따른 후 평양에 두 번이나 다녀오면서도 고향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치승)가 지주였고 일제 치하의 관리로 지낸 사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부모와 아내와 딸이 그에게는 짐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집안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서울에서 오로지 지하활동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정기출의 어머니 설은영은 순창 구림면에서 유복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를 잘하므로 아버지가 전주에 있는 여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졸업반 때 6.25가 나고 순창도 공산당의 치하가 되었다. 그녀는 학업 도중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와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이때 스물다섯 살인 오빠 설공식이 군 당위원회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6.25가 났고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와 서울을 점령하자 성연은 드디어 공산 통일이 될 것이라며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때 정성연이 인민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전북 도당위원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순창에 지원을 나왔다가 우연히 대학 때 친구인 설공식을 만나게 되었다. 은영이 두 사람의 밥상을 차려주게 되어 둘은 안면을 트고 인연이 시작되었다. 은영은 헌칠한 그리고 대학출신 성연에게 끌리는 마음이 일어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때로는 오빠에게 옷가지를 보내준다는 핑계를 대고 읍내에 가 성연을 만났다. 성연도 은영의 미모에 이끌려 구림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성연은 남원에 계신 부모, 아내와 딸이 눈에 아른거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은영에게 끌려 있었다. 설공식은 사실 성연이가 남원 사람인 것 말고는 집안 사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둘이 서로 연모하는 것을 보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여기고 속으로 응원하였다. 통일이 되면 속히 부모님께 허락을 얻어 결혼식을 올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인민군이 서울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사흘을 지체한 얼마 후 바로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16개국이 대거 참전하였다. 곧 무너질 것 같은 낙동강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르러 장기화가 되자 성연은 회의(懷疑)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유엔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는 뉴스에 이러다간 통일은커녕.’ 실망하며 망연자실하였다.

드디어 9월 중순 인천을 시작으로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북측이 남쪽에 있던 주력부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철수시기를 놓쳐 고립된 남쪽의 일부 인민군과 공산당은 지리산과 회문산 일대에 남아 이른바 빨치산(러시아어 partizan, 적의 배후에서 통신·교통시설을 파괴하거나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비정규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전후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산게릴라)이 되어 국군·경찰과 자주 충돌하며 저항하게 되었다.

회문산 빨치산에는 정성연과 설공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빨치산들은 양식을 구하러 한밤중에 자주 산에서 가까운 마을로 몰래 들어왔다. 설공식의 부모는 아들의 일이어서 쌀과 보리를 내주고 있었다. 은영은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더더욱 공산주의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오빠의 일이었고 이미 연인 사이로 살을 섞은 성연의 일이었기에, 군과 경찰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수시로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오곤 하였다.

1951년 봄, 군경이 마침내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성연은 은영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주면서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서울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구 정한조를 찾아가라.’ 는 말을 남기고 산속으로 돌아갔다. 그 사흘 뒤 해질 무렵, 은영이 아랫마을을 지나 읍내 쪽의 동태를 살피러 갔다. 늦은 밤, 여기 저기 총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커진 은영이 급히 새벽에 돌아왔을 때, 어느 쪽이 불을 질렀는지, 온 마을에 연기가 자욱하고 집이 불에 타 무너져 있었다. 너무나도 참혹한 모습-마루 앞 뜰방에 올케와 조카가 피를 흘려 숨이 끊어져 있고 안방에 부모님이 불타 숨져 있는-을 본 그녀는 혼비백산하였다. 사람들의 인기척과 저벅저벅 발소리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급히 측간 뒤쪽으로 숨었다. 군인과 경찰들이 시체들을 거두어 마을 입구의 한곳으로 모으고 돌아가는 것을 본 은영이 급히 안방으로 가 장롱을 열어 어머니와 올케가 감춰 둔 패물과 돈을 허리에 차고 북쪽을 향해 내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은영이 서울로 올라와 경찰청 본부로 옮겨 간 정한조를 찾아냈다. 한조의 아내가 지난해 말 딸아이를 낳고 얼마 후 산후 후유증으로 곧 세상을 떴고, 그의 집에는 노모와 돌도 안 지난 딸만 남아 있었다. 손녀를 돌보며 밥을 챙겨주던 한조의 노모가 은영을 보자 반색하더니 그날 바로 다른 자식들 밥을 챙겨줘야 한다며 정한조의 고향 안성으로 내려가 버렸다.

 

원래 성연과 한조는 대학 동기동창으로 절친이었다. 그들이 졸업할 무렵 은사인 민 교수가 둘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수석을 다투던 또 둘도 없이 친한 너희들이, 한조는 우익이 되고 성연은 좌익이 되고 말았구나. 사상이 뭐란 말이냐? 둘을 이리 갈라놓다니. 앞으로 어느 세상이 올지 안개 속이라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기는 쪽이 진 쪽을 챙겨주어라.”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면서도 굳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갈 곳이 따로 없던 은영은 어쩔 수 없이 짐을 내려놓았다. 한조는 은영이 내놓은 성연의 작은 주머니를 풀었다. 거기에는 성연의 때가 절은 속옷 조각과 잘려진 머리카락 한 움큼, 그리고 쪽지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한조는 그제야 은영이 임신한 것을 알았다.

울고 보채는 한조의 어린 딸을 본 은영은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고 죽을 끓여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라디오에서 회문산 빨치산들이 일망타진되었다.’는 뉴스를 말하고 있었다. 한조는 은영에게 경찰청 상부의 명에 따라 동료 세 명과 같이 회문산으로 출장을 가 사망한 빨치산 명단을 정리하고 시신을 매장하는 일을 지휘하고 어제 올라왔다.’라고 말했다. 은영이 울면서 오빠의 소식을 물으면서 연인 성연이 어디 살던 누구였는지를 여러 번 물었지만, 한조는 정성연과 은영의 오빠가 이미 죽어 매장 처리되었고 지금은 잊고 지내야 한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은영이 78개월여 뒤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돌이 지날 무렵인 1952년 가을 한조는 혼자 남원을 다녀온 후 이름을 기출이라고 지어 자기의 호적에 올렸다. 각방자리를 해 오던 둘은자연스레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정한조는 전 부인이 죽은 후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고, 설은영은 전 부인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리고 슬하에 딸과 아들을 더 두었다.

기출이 공무원이 되어 1년이 지난 스물일곱 살 무렵, 한조는 아내 은영과 기출을 데리고 전주로 내려갔다. 마침내 눈물의 조·손 상봉이 이뤄졌다. 기출의 고모 가족(이구창 부모)과 배다른 누나 가연의 가족도 모두 전주에서 모여 온 가족이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다.

친구 성연이 죽었지만, 그 아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성연이가 편지로 이리 말했습니다. ‘빨치산의 아들보다는 경찰의 아들로 살게 해주는 것이 좋겠다.’ 저도 그리 생각해서 지금껏 이 애의 출생을 비밀에 부쳐 왔던 것입니다. 이 아이가 다행히 잘 커 주고 우리에게 효도해 주었습니다. 원래는 대학 입학 때 데려오려고 했지만,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여 기다려 왔습니다. 이제 군대도 갔다 왔고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또 어르신이 정정하게 살아계실 때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가 이리 서둘러 온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정문섭 박사 이력

 

195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중국어 전공) 졸업

1981년 중앙부처 공직 입문, 2009년 고위공무원 퇴직

-1996~2000, 2004~2007 중국 북경 주중한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

-농업인재개발원 원장, 한국수산무역협회 전무이사, 한국농업연수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중국전문교수 7년, 건국대 충주캠퍼스 겸임교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네팔 자문단 포카라대학 교수 파견

-<한·대만 농지임대차제도 비교연구>(1988, 대만 국립정치대학 법학 석사학위 논문)

-<한·중 농지제도 비교연구>(2000, 중국 농업대학 관리학 박사학위 논문)

-<인문고사성어>(2013, 이담북스, 415쪽)

-‘공무원 연금’(월간) 공모 연금수필문학상(2019) <안나푸르나 봉, 그곳에서 다시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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