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철학자 이야기]시간표 새로 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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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철학자 이야기]시간표 새로 짜기
  • 최순삼
  • 승인 2024.06.0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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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퇴직한 지 100일이 지나간다. 삼사 년 전부터 아침까지 잠을 푹 못 잔다. 중간에 한두 번 일어난다. 어설픈 걸음으로 화장실을 다녀온 후 뒤척이다 다시 잔다. 새벽 다섯 시 전후에 일어나면 출근 시간이 걱정되어 다시 못 잔다. 졸음과 피곤함을 뒤로 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20243월부터 새벽에 일어나도 피곤하고 졸리면, 부담 없이 편하게 잔다. 받아 든 시간표가 아닌 내가 짠 시간표가 작동함으로 두 다리를 뻗고 잔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내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상황 내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퇴직 전과 후, 필자는 여하튼 처한 상황이 달라졌다. 처한 상황이 달라지면, 뒤따라와야 하는 게 새로운 일과표가 아닌가? 학창 시절 방학이면 집에서 어떻게 지낼지 시간표를 짜라는 숙제가 있었다. 제출한 시간표와 방학 생활이 일치된 아이들은 별로 없었고, 필자는 한 번도 없었다.

 

퇴직 후 100일이 되면서 누구도 검사하지 않고, 묻지도 않는 시간표를 새로 짜야 함을 절절히 느끼고 있다. 자문(自問)하고 자답(自答)할 때 최소한 80% 이상 지켜지는 시간표를 짜고 싶다.

우선 잠자고 먹는 등 기본생활 시간을 빼고,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하나하나 짚어 본다. 계획 없이 지나간 100일 동안의 일상을 비판적으로 찬찬히 검토해 보면 실천이 가능한 시간표를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서 자기 삶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주일 단위로 보낸 시간을 대략 계산해 본다.

100일 중 25일 정도는 가보고 싶은 국내·외 여행지를 다녀왔다. 8시간 정도 걸었다. 청소와 설거지 등 집안일과 주말농장 텃밭 가꾸기 시간은 합해서 4시간 정도였다. 집 근처 도서관과 서점, 집에서 책 읽은 시간 21시간. 순창에서 뜻있는 분들과 함께하는 모임에 참석 3시간. 선후배와 친구, 지인 등을 만나는 시간 20시간. 민요 배우기와 철학 등 학습모임 참여 5시간. 핸드폰 사용 및 티브이 시청 18시간. 그리고 가족들과 대화로 15시간을 함께 보냈다. 매주 조금씩 다르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5월부터 비교적 위에서 열거한 시간을 맞추어 생활하고 있다.

100일간의 시간을 찬찬히 톺아보면, 여행과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다양한 지인들을 만나는 시간의 비중이 매우 컸다. 퇴직 후 찾아오는 해방감에 들떠서 보낸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 전 순창읍장님 비유처럼 정부미(政府米)’에서 일반미(一般米)’처한 상황이 바뀌니 생각 없이 편안함을 추구했다.

 

그럼 이제 늘려야 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이며,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늘려야 하는 시간은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일주일에 5시간 정도 늘려가면 좋겠다. 걷거나 운동하는 시간과 가족과 대화의 시간도 서너 시간 이상 늘렸으면 좋겠다. 집안일과 텃밭 가꾸기 시간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존역량 없는 노후는 자신에게 부끄럽다.

매일 아침 작은 조롱이로 20개 이상의 크고 작은 화분에 아내가 물을 준다. 화분 4개에 2 인생을 힘차게 응원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려 있다. 서양란인데 아내의 정성으로 여전히 꽃이 다시 피고, 싱싱하다. 요사이 소파에 앉아서 물끄러미 리본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한다. ‘나에게 제2 인생은 무엇일까?’ ‘내 인생 사전에 제2 인생이 무엇이라고 뜻풀이를 하여 적을 수 있을까?’

공적인 직책이 없는 퇴직 후 삶은 비교적 자유롭다. 누구에게 지배받지도 않고, 누구를 지배할 필요도 없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도 보인다.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성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찰하는 습관은 멈춰서 돌아보고, 떨어져서 찬찬히 보고, 탐욕에 대한 분별심이 있으면 길러진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인가?’에 누구도 명쾌하게 답할 수 없다. 명쾌하게 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를 믿어서도 안 된다. 다만 자기 삶의 시간표를 거듭거듭 다시 짜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는 사람이 좋은 삶의 곁에 다가갈 수 있다. 일상의 시간표를 새로 짜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재구성해 갈 수 있다.

그리고 철학은 좋은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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