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숨겨진 이야기(20)일제강점기 순창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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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숨겨진 이야기(20)일제강점기 순창①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4.07.0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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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민이 알아두면 의미 있는 이야기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순창 관련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사실 위주로 살펴봅니다.

 

1910822<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829일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01일 조선총독부가 설립되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첫 총독으로 부임했다. 헌병경찰제도가 실시되었고 조선인들에게는 조선 태형령(朝鮮笞刑令)과 즉결 처벌권(卽決處罰權) 등이 행해졌다.

1911<삼림령>1916년 임야 조사사업을 통해 전체 산림 가운데 60% 이상을 국유림으로 하였다. 국유림에서는 가축 방목이나 땔감 채취 등을 금지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456만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다. 순창에서도 19147월 중순부터 토지조사사업 준비 조사가 이루어졌다.

1914년 대대적인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이에 따라 면··((·() 등 잡다한 호칭이 면()으로 단일화되었다. 면에 관리와 청사가 설치됨으로써 면은 정식 행정기구와 구획이 되었다. 41일부터 대폭적인 폐치 분합이 이루어져 전국이 13122202,521면으로 통합·개편되었다. 1906년의 4338면에서 거의 절반가량이 줄어든 셈이다. 군의 면적은 40방리(方里), 면은 약 4방리 800호를 최저 기준으로 정했다. 이때 순창군은 14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7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 때 좌부면과 우부면을 합쳐 순창면으로 하여 13면이 되었다. 이때 순창면사무소가 순창면 대동장(大東場)터에 신축되었다. 이어 1919년에는 금동면과 목과면을 합해 금과면을 만들어 12126리가 되었다.

1923년 순창읍 남계리 800번지 일대에 5일장이 개설되었으며, 1930년에는 남계리 757번지 일대에 순창 우시장이 개설되었다.

194251일 순창공립농업학교(현 제일고)가 개교했다.

 

지방 행정구역 개편

1914년 대대적인 지방 행정구역 개편 때 순창군은 인화면과 호계면을 합해 인계면, 풍실면과 오산면을 합해 풍산면, 팔등면과 덕진면을 합해 팔덕면, 상치등면과 하치등면을 합해 쌍치면, 남원군 영계와 아동면의 구미·어치·동심을 편입해 동계면을 만들었다. 기존의 좌부면·우부면·금동면·목과면·복흥면·적성면·유등면·구암면·무림면과 함께 순창군은 14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7년 좌부면과 우부면을 합쳐 순창면으로 하여 순창군은 13면이 되었다.

1919년 금동면과 목과면을 합해 금과면을 만들어 순창군은 12126리가 되었다.

1935년 구암면과 무림면을 합해 구림면으로 하여 순창군은 11131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순창면 행정구역 변화 내용

좌부면(12개 리)과 우부면(12개 리)이 합해 순창면(7개 리)이 되었다. 순창면 리(법정리)는 순화리, 남계리, 장덕리, 복실리, 백산리, 교성리, 가남리, 신남리가 되었다.

좌부면의 옥천동·관북리·후리와 상전리 일부·도실촌(道實村), 우부면(右部面) 신촌(新村)의 각 일부를 합해 순화리(淳化里)가 되었다.

은행정리·하전리·상전리와 우부면 가잠리(佳岑里) 일부를 합해 남계리(南溪里)가 되었다.

장덕리는 그대로 장덕리, 복동과 도실촌 일부를 합해 복실리(福實里)로 하였고, 우부면의 백산리·백야치(白也峙)와 신촌(新村)의 일부를 합해 백산리로 하였다.

가잠리·남산리와 오산면 상동리 일부를 합해 가남리(佳南里)로 하였다.

교촌(校村성현리(星峴里원촌(院村오산리·평지리와 남산리·교항리 일부를 합해 교성리(橋星里)로 하였다.

무수동(舞岫洞신월리(新月里신남리(新南里묘법리·탄금리와 풍남면 와룡리와 보내리 일부를 합해 신남리로 하였다.

 

사회·경제적 상황

3.1운동 이후인 1920년대에 들어 헌병경찰통치제도가 보통경찰제로 변화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는 등 문화통치가 표방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사회운동단체가 나타났다.

순창에서도 1920년 순창청년회(淳昌靑年會), 1924년 순창청년동맹(淳昌靑年同盟), 1925년 동계청년회, 1926년 순창기독면려청년회(淳昌基督勉勵靑年會), 1928년 순창청년동맹 인계지부, 1928년 순창청년동맹 유등지부, 1928년 순창청년동맹 금과지부 등이 만들어져 활동했다.

 

산업 현황

1933년 전북일보사에서 편찬한 전북 안내에 따르면 1931년 기준 순창군 토지 총면적은 45,484() 5()이었다. 그중 논은 7,2268, 밭은 4,3236, 집터는 5056, 잡종지는 656(), 임야는 33297정이었다. 기타 123정은 대부분 임야이었다.

농업을 보면, 1931년 쌀은 102,032, 보리 53,747, 콩류 1281석을 생산했다. 잠업은 1931년 수확량이 210정이며, 사육 호수는 4,565, 누에떨기(掃立·소립) 수는 3,894(), 누에고치는 1,954석을 생산했다.

1928년 순창군 축산 현황을 살펴보면 소 3557, 38, 염소 143, 돼지 5727(재래종 4735, 개량종 993), 29047(재래종 24408, 개량종 4639)두 이다. 양봉 가구는 655곳이었다.

 

순창읍 시장

일제는 19149월 총독부령 제136호로 <시장 규칙>을 공포했다. 조선총독부는 <시장 규칙>을 통해 시장 신설이나 변경 등 모든 사항에 대해 도장관(道長官)의 허가를 받도록 하여 허가주의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소·돼지 등의 축산류는 반드시 가축시장, 또는 우시장에서 매매하도록 했다.

16세기에 순창면 경천변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창 읍내장은 192311일 남계리 800번지 일대에 조성되어 개장했다. 1930년에는 남계리 757번지 일대에 순창 우시장이 개설되었다.

 

교통수단

1928년 기준 순창군 교통수단은 자동차 5, 손수레(하차·荷車) 6, 우차(하우차·荷牛車) 34, 마차(하마차·荷馬車) 19, 자전거 116대였다.

 

인구 현황

1928<순창군 군세 일반>에 따르면 순창군 전체 인구는 1928년에는 14,220가구에 69468명이었으며, 1930년에는 74539명으로 해마다 증가세를 보였다.

순창면 인구는 1,622가구에 7,855명이 거주했다. 그중 조선인은 1552가구에 7693명이고, 일본인이 50가구에 144, 중국인이 9가구 18명이 거주했다.

 

참고문헌

순창면 지지조서(1916)

순창군 군세 일반(1928)

전북 안내(전북일보사, 1933)

순창읍지(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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