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여생/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상태바
호구여생/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 정문섭 박사
  • 승인 2012.04.19 0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虎 호랑이 호 口 입 구 餘 을 여 生 날 생
정문섭이 풀어 쓴 중국의 고사성어 31

‘죽어 정승으로 지내면 뭐하나, 천하게라도 살아있는 것이 좋다’는 옛 말이 있다. 뭔가를 이루려면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서에는 소신을 고집하다가 죽은 충신들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러한 기백으로 살아남아 나라를 일으키는데 힘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 숨어 지내다가 나라가 필요할 때에 나타난 위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길이 남는 경우도 있음을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毛澤東)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죽임과 숙청을 당한 자들 중에는 이른 바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대항한 고위직 지식분자들이 많았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 끝까지 반항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서 죽은 류사오치(劉少奇)를 들 수 있다. 비록 수십 년이 지나 훗날 복권이 되긴 하였지만 사람들에게는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여겨지는 인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鄧小平)은 달랐다. 하방(下放 : 공장, 농촌, 광산 등에 노동하는 일)기간 중 두 번에 걸쳐 긴 편지를 썼다. ‘마오(毛) 주석,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필자는 이에 대해 덩이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기회를 잡기 위해 속과 겉이 다르게 쓴 것으로 판단한다. 마침내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건의를 받아 그를 불러 들였다. 마오의 병사 후 1978년 겨울 마침내 덩은 ‘개혁개방’의 기치를 높이 올려 오늘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소나기를 잠시 피했다 나타난 그에게 중국인들은 ‘위대한 중국의 총설계사’라는 존칭으로 화답하였다. 

그가 일찍이 호구여생(虎口餘生)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일까? 

사마천(司馬遷)의 «史記·叔孫通列傳(사기·숙손통열전)»에 나온다. 公不知也, 我幾不脫虎口(공부지야, 아기부탈호구) : 너희들은 모른다. 내가 하마터면 호랑이 굴에서 못 빠져나올 뻔 했다.

진(秦, BC 221-206)나라 말년 마침내 진승(陳勝)이 처음으로 기병하여 진나라에 항거하였다. 2대 황제 호해(胡亥)가 보고를 받고 바로 박사와 유생 20여명을 모아 이 건에 대하여 어떤 생각과 의견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일부 박사와 유생들은 황제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묻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이러한 반역죄는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즉시 출병하십시오.”

호해가 듣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우리 진나라는 태평성세를 이룩한 대국인데 몇몇 유생놈들이 감히 과인의 면전에서 이 조그마한 사건을 놓고 ‘반역’이라고 떠들어대다니….’

바로 얼굴에 노기를 띠기는 했으나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다른 신하들이 또 어찌하나 하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때 숙손통(叔孫通)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하는 때가 아니다. 잘못하다간 내 목까지도 날아가겠구나. 이럴 때 어떤 이상이나 포부를 말할 때가 아니다.’

숙손통이 마침내 바로 일어나 말했다.

“폐하, 여러 사람이 방금 말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일찍이 시황제 시절에 이전의 각 나라의 성곽을 헐어 버리고 병기를 몰수하여 녹여 버렸는데 이는 천하가 태평하다는 것을 표한 것으로 다시는 전쟁이 날 수도 없고 전쟁이 나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영명하신 폐하께서 천하를 이렇게 잘 다스리고 계시는데 어찌 감히 반역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진승이라는 작자는 닭이나 개를 도둑질하던 밤도둑에 불과하여 졸개나 몇 놈 보내 처리하면 될 것인데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데 정말 가소롭습니다. 그런 말에 괘념치 마십시오.”

호해의 마음을 정통으로 맞춰낸 그의 이 한 마디에 호해가 그제야 미간을 펴고 웃으며 잘 말했다고 소리쳤다. 이어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다시 말해 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눈치를 못 채고 계속 ‘반역’을 거론한 자는 모두 죄를 받았고, 태도를 다소 누그려 말을 바꾼 사람은 관직을 잃게 되었다. 숙손통만이 상을 받았다. 

숙손통이 집에 돌아오자 그가 조정에서 한 말을 들은 문하생들이 모두 몰려와 비판하였다.

“어찌 그렇게 아첨하여 빌붙을 수가 있습니까?”

“너희들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하였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황제 옆에 있는 것이 마치 호랑이 옆에 있는 것과 같았다. 만일 잘 대처하지 못하였더라면 하마터면 호랑이 굴에서 빠져 나오지도 못할 뻔하였단 말이다.” 

이후 그는 지금의 황제와 같이 지내다가는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어 결국 진나라 도성을 몰래 빠져 나와 멀리 도망쳤다. 

후세 사람들은 숙손통이 ‘범의 아가리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 고사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나다’는 의미를 갖는 성어를 만들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뜻이다. 후세 사람들은 좀 더 나아가 ‘명분과 소신을 위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 을 비난하거나 아쉬워하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글 : 정문섭 박사
     적성 고원 출신
     육군사관학교 31기
     중국농업대 박사
     전) 농식품부 고위공무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순창 농부]순창군창업유통연구회 변수기 회장, 임하수 총무
  • 최순삼 순창여중 교장 정년퇴임
  • 선거구 획정안 확정 남원·순창·임실·장수
  • 순창시니어클럽 이호 관장 “노인 일자리 발굴 적극 노력”
  • 군 전체 초·중·고 학생 2000명대 무너졌다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