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순창만 가지고 있는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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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순창만 가지고 있는 문화
  • 양상화 이사장
  • 승인 2012.05.1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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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양상화 단군사상선양회 이사장

어느 곳이고 지역에 알맞은 특수한 문화가 있다. 우리 고향 순창은 특수지역이면서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없는 문화유산이 몇 가지가 있다.

순창 땅의 지형적으로 순창 땅에 떨어지는 빗물 한 방울까지도 다른 지역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서쪽에서 들어온 후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유등면 외이리 앞 섬진강으로 모든 물이 모여들어 광양만에서 바닷물과 합수하게 된다. 바람과 물을 따라서 순창 땅에서 생산되는 산소는 모두 한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발효식품의 이름난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전북의 남단 산간벽촌이지만 전라도의 중심지역이다.

호남의 명승지로 후천(後天) 문화(文化)가 돌아온다고 하는 회문산(回文山)이 서 있으며 그 형상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오선위기(五仙圍碁)형상이다. 다섯 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는데 남북 신선이 대국을 하고 동서에 앉은 신선이 응원을 하며 뒤에 서있는 회문 신선이 심판을 보는 형국이다.

따라서 문화라는 어원의 창제 원리를 살펴보면 배달한국 한운천왕의 명에 따라 신지혁덕께서 창제한 우리 문화를 살펴보면 문(文)자는 ‘하늘과 땅을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것이 문자이고 화(化)자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수와 숟가락 비(匕)를 합쳐서 화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라는 뜻이다. 따라서 현대 인류의 3대 요소가 명예 지위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우리 선혈들은 충효열을 추앙하였다. 그러므로 남녀의 사랑이 가장 소중하므로 순창의 진실한 사랑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지금부터 500여년 전에 조선조 연산군 때의 일이다. 순창방에는 순창을 본관으로 하는 렴(廉)씨가 대성을 이루고 살았고 오산방에는 창령조씨가 살았다. 조진사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하나 두었는데 어려서부터 학문과 덕행을 쌓아 오던 중 장성하여 혼인을 시키기로 하고 중매쟁이 매파를 놓은 것이 순창방 염씨 총각과 혼인이 성립되었다. 혼인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나 이때에는 연산군은 채홍사라는 특수한 직책을 주어 전국적으로 예쁜 미인만 찾아다녀 즉석에서 선택되면 강제로 궁중으로 보내는 신종 직업 누리꾼이 있었다.

채홍사가 전국을 누비면서 예쁜 미인을 찾던 중 조진사의 외동딸이 절세 미인이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직접 순창에 도착하여 살펴본즉 천하의 절세 미인임이 틀림없었다.

이와같이 천하일색 미인을 뽑아가야만 연산군으로부터 포상을 받을 수 있었으며 벼슬길도 열리게 되었다. 조진사 외동딸을 연산군의 첩실로 간택하여 몇 일 후면 한양으로 데리고 갈 날자를 결정하여 조진사에게 최후 통첩을 해 주었다. 조진사 내외는 그야말로 청천 벽력같은 통지문을 받아들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눕고 말았다. 이와같은 소식을 접하게된 렴씨 총각은 식음을 전폐하여 죽을지경이 되고 말았다. 렴씨 총각은 죽음을 각오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죽기전에 부모님께 당부하기를 ‘내가 죽거든 조진사 딸이 한양으로 가는 길 사거리 한가운데에다 묻어달라’고 하고는 시름시름 앓더니만 결국은 죽고 말았다. 창령조씨는 렴씨 총각 소원대로 오산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과 순창에서 남원으로 가는 동서길과 교차하는 사거리 한 복판에다 묻어 주었다. 조진사의 딸도 자기와 혼인하려던 배필이 죽어서 사거리에 묻힌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채홍사에 선택되어 강제로 한양으로 가마를 타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조진사 내외는 이렇게 엄청난 사실 앞에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고 하늘만 원망하며 품안을 떠나가는 가마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조진사의 딸은 렴씨 총각이 묻혀 있는 사거리에 도달하여 채홍사에게 이곳에서 잠시 쉬어갈 것을 간청하였다. 이곳에 가마를 세우고 잠시 후에 채홍사가 가마를 재촉하여 한양으로 발길을 재촉하였으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가마꾼들 네 명이 아무리 가마를 땅에서 들어올려 메고 갈려고 하여도 가마가 땅에서 도무지 떨어지지를 않았다. 가마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너무나 조용하여 가마안을 들여다 본 채홍사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조진사의 외동딸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여 있었다, 이소식을 들은 조진사 내외가 아무리 빌어도 가마가 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채홍사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하더니 가마를 내팽개치고 한양으로 올라가버렸다.

순창군수가 도착하여 이곳에 두 사람을 상징하는 가마탑을 세우고 이날을 기념하고 매년 원혼제를 지내주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가마가 땅에서 떨어져 이동하였다. 이곳에다 어느 곳에도 없는 가마 모양을 한 가마탑을 세우고 매년 군수가 주관하여 진혼제를 지냈다. 이곳은 공유지로 아람드리 느티나무 귀목이 여러 그루 있는 공원이 다름없는 곳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분할하여 매매되어 지금은 귀목 한그루와 쓰러져가는 가마탑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가마탑은 어느 누구도 돌보는 이가 없는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때부터 처녀와 총각이 혼인을 하기 전에 죽으면 길 한복판에다 묻어주어 관습이 생겨났다.

이와같이 순창은 정신문화와 자연 형상문화까지 특수한 고장이었으나 대가족제도가 무너지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소중한 정신문화까지 사라져가고 있어서 몹시 아쉬움만 남는다.

순창 땅에는 이밖에도 쌍치면 오룡리 뒤에 반룡리라는 마을이 있었고 이재를 넘어 왕래하는 정읍과 순창으로 이어지는 재가 하나 있었다. 엄청나게 부자로 만석군인 박인걸이 피부병으로 죽기직전에 어느 도인의 지시로 많은 곡식으로 적선을 하여 질병을 고치고 나라로부터 증가선대부의 벼슬을 받은 사실이 커다란 바위에 암각되어 있으나 어느 누구 한사람도 찾는 이가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복흥면 동산리에 옛날에 조(槽)동에서 태어난 한 성현 노사 기정진 선생의 역사적 사실도 순조 임금님의 ‘장안(長安) 만목(萬目)이 불(不)여(如) 장성(長城) 일목(一目)’이란 말에 따라서 순창 사람이 장성사람이 되어버린 사례도 있어서 사라져 가는 문화를 보면서 커다란 아쉬움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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