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떽(24)/ 왜 돌아가시믄 더 생각나는지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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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떽(24)/ 왜 돌아가시믄 더 생각나는지 몰라라
  • 황호숙 황홀한농부
  • 승인 2013.09.0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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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떽네 오지게 사는 이야그 24

벌초                       -이재무 지음


무딘 조선낫 들고
엄니 누워 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 발톱 깎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호랭이가 물어가게 바쁜 나날들이구만요. 후줄근허게 땀이 배던 날씨가 새벽녘으로는 제법 서늑서늑해징게 옷깃을 여미게 되네요. 참말로 간사한 것이 사람이라고 문 활짝 열고 선풍기 틀고 대자로 누워잤등만 곰방 창문 닫고 얇은 이불 덮어야 괜찮아지니 가을은 가을인갑소잉!
워따 뜨건 국에 맛 모리더라고 지가 요새 그짝이구만요. 오메! 머릿속에 오일장이 서분다는 말이 요럴 때 쓰는 것이당가요.
암튼 시방 서울떽네 서방과 각시는 벌초하러 다니느라 쌔빠진당께요. 엄살 핀다고 쯧쯧쯧 허셨제라. 대충 세어 봐도 60봉상이랑게 숨이 터억 막히시제요. 지가 시집 옹께 거짓말 쬐까 보태서 조선 낫 들고 한 보름도 넘게 벌초하러 다니는 것 같았어라. 손 없는 묘 벌초해주고 제사 지내주면 복 받는다는 옛날 말쌈을 철썩 같이 믿어농게 자손들이 없거나 찾지 않는 묘지들도 많아 불드라구요. 옛말에 “넘의 사정 봐주다 시아버지가 열둘이라드니”라는 말 있는디 따악 그짝이었제라. 워낙에 오정자 나뭇꾼은 효자라 군소리 없이 아버님 말씀에 따랐지만 서울떽 눈에는 엉뚱깽뚱허기도 허고 시상에나 지가 문중 맏며느리도 아닌데 웬 팔자라며 마뜩찮아 했어라.

 

꼼꼼허신데다가 문중과 조상 모시는 게 일평생 과제이신 울 아버님은 홀로 되시고 나니 마음이 더 울적해지셨는지 추수 끝난 그 겨울부터 봄 되기까정 “아야! 내가 살믄 월마나 살겄냐. 느그 할머니 이장만 험사 소원이 한나도 없겠다”, “내가 올해 9월에 죽는다더라. 요번 봄에 할아버지 산소 단장 좀 허고 비석 공사좀 허자”, “내 나이 이제 75인디 내 평상 이 일 만큼은 꼭 허고 죽어야 조상님들 볼 수 있겄다” 하셨제요.
긍께 아흔에 돌아가시기까정 일 년에 한 번씩 조상 묘에 공을 들이셨죠. 조상에 대한 예우를 나름 마치시고 돌아가셨지요.
처음에는 벌초하는데 따라다니시더니 마음과 달리 3년 정도 지나자 힘겨워 하시더라구요. 산 밑에서부터 꼭대기 까지 있는 봉분들과 시제 산에 있는 봉분들은 벌안도 넓어서 갈퀴가지고 따라 다니려면 땀이 비 오듯 해야 했거들랑요. 산 세 개는 기본으로 타야 되는디 아이고 팔자타령 그만두고 내가 따라다녀야겠구나 싶었죠. 가방에 칼날 넣고 공구들 넣고 얼음물도 넣어 가지구 혹시라도 땅벌과 마주칠까 에프킬라도 넣으면 꽤 묵직해지죠. 거기다가 기름통 옆에 들고 갈퀴 챙기고 낫이라도 한나 챙겨들믄 완전 무장이 되제라. 난중엔 꾀가 생겨서 얼음 맥주도 챙기제라.
오른쪽 산꼭대기 굿바우 평평한 곳에서 마지막 벌초 허고 한잔 꿀꺽꿀꺽 마심서 내려다보이는 안골과 오정자 앞뜰과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들 보면서 오순도순 이야그 허다보면 앙금들도 많이 풀렸었제라.  진짜로 운이 좋은 날은 영지버섯도 엄청 따 불고 바위 밑에서 느타리 버섯도 한 웅큼씩 따는 재미도 있고라. 운때가 맞으면 꽃 버섯도 따서 비닐 종이에 가득 따오기도 헌당게요. 내려 오는 길, 스리슬쩍 대밭골쪽 능선을 타고 오다 고 귀허디 귀헌 유월 버섯 딸 수도 있고라. 한해는 송이버섯도 따 봤는디 처음 따라가서는 살모사나 점사랑도 마주치며 기겁도 허고 우리 토종 블루베리라고 허는 정금도 따다 술도 담그고 했었제요.  몇날 며칠 벌초를 허고 기진맥진해서 내려오면 아버님이 쐬주 한 병 갖다 놓고 김치쪼가리에다 잔에 그득 술 따라주며 애썼다고 하셨지요. 그 맛이 꿀맛이었는디요!

그러다 봉께 울 아버님이 슬슬 지헌테 마음을 여시는 것 같았는디 귀머거리 3년, 벙어리3년, 장님 3년의 세월을 보냈어도 지가 도망 가버릴 거라고 생각하셨나 애먼말로 지 가심팍을 새까맣게 태우셨거들랑요. 근디 난중에 들응게 경로당 친구분들헌티는 칭찬을 허심서도 마을에선 조심하셨더라구요. 돌아가시던 해 이맘때 병원에서 수술을 허시고 집에 와 계시면서 계속 제 손을 잡고 부탁하셨어라. “아야 내허고 니 어메 제사는 꼭 니가 해주면 안 되겄냐! 나는 안골에서 밥 얻어 묵고 싶어야. 요런 말 허는 시애비가 밉기도 허겄지만 워쪄겄냐. 내 소원인디.” 그해 가을 울 아버님 꼬박 꼬박 묻어둔 통장 헐어서 제 양장 한 벌, 털 달린  외투 한 벌까정 특별히 사주셨당게요. 돈으로 주면 절대 옷 안사 입는다고 직접 돈 계산 까정 하심서요. 형님들이 ‘아부지, 우리도 옷 사줘요’ 아무리 뭐라 캐도 꿈쩍도 않으시더니 함께 살며 웃음 드렸던 아이들의 옷 한 벌씩 사주시며 흐뭇허게 웃으셨죠. 벌초하다 그 웃음이 생각났당께요. 왜 돌아가시면 더 생각나는지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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