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재(118) 죽음은 영생의 지혜

2015-02-06     박재근

죽음을 알아야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인생의 재앙이 아닌 이정표이다. 올바른 삶 진정한 인생에는 죽음이 동반한다. 열매는 땅에 묻혀 죽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고 사랑이 살기 위해서는 미움과 증오가 죽어야하며, 정의가 살기 위해서는 불의가 죽어야하고, 선이 살기 위해서는 악이 죽어야 하며, 진실이 살기 위해서는 거짓이 죽어야하고, 용기가 살아나려면 불안과 두려움이 죽어야 하며, 좋은 습관이 살아나려면 나쁜 버릇이 죽어야하고, 평화가 살기 위해서는 욕망이 죽어야 하며, 이성이 살기 위해서는 감정이 죽어야 하며, 지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집착이 죽어야 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위해서는 무의미한 시간을 죽여야 한다.

삶이란 무에서 발생하고 죽음이란 왔던 곳으로 돌아감이다.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집 나온 어린아이가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같다.”<장자> 죽음은 비움의 가치와 의미를 가르치는 삶의 교사이다. 삶이란 욕망을 담는 것이며 죽음이란 욕망을 비움이다. 욕망의 죽음은 비움을 살리며 비움은 평화를 만든다. 욕망을 비운다는 것은 죽음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욕망이 있는 곳에는 비움이 없고 비움이 없는 곳에는 도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하고 나는 유한하다. 장수한다는 것은 유한한 나, 바람 앞의 촛불 같이 꺼지기 쉬운 나에게서 벗어나 사람의 삶 인류 공동체의 삶을 사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짐 벗음의 지혜를 터득한다. 삶이란 좋은 일만이 아니라 불쾌한 고통, 실수, 실패, 불안 분노 두려움, 치욕이라는 짐을 지고 가는 것이며 죽음이란 짐을 벗어 내려놓음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마음이 욕망이라는 어두운 감정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죽음이 예고 없이 방문한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담고 사는 것이며, 희비애환과 좋아하며 싫어함, 이해득실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이다. 불행은 사치와 허영심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면서 시작된다. 사치와 허영심은 필요를 확장하고 필요의 확장은 궁핍을 낳고 궁핍은 불만과 불안을 늘리면서 마음의 평화를 깨뜨린다.

만약 오늘 죽는다면 내일 몫을 챙길 이유가 없고, 지금 필요한 외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세상의 불행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죽음은 예고 없이 와서 나의 생명과 재산을 회수하여 남에게 돌려줌으로서, 욕망을 채우려고 희비애환 하는 것이 어리석은 헛수고임을 일깨우며, 부질없고 의미 없는 욕심으로 마음에 짐을 주지 말고 욕심에서 해방된 진정한 자아를 찾아 살라한다. 죽음은 탐욕을 경고하고 교만한자를 벌겨 벗겨 초라하게 함으로서 겸손을 가르친다. 죽음은 과거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살아라한다.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이며 미래는 나와 상관없는 사후의 일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비움이다. 욕망을 비우면 사물의 진상을 보는 지혜를 얻는다. 욕심은 사물의 진상을 가리며 진상이 가려지면 거짓에 속게 되고 거짓은 어리석음을 낳는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우면 세상이 편안해진다. 불행한 자란 자기 밖의 것을 욕심내는 자이며 행복한 자란 자기안의 것으로 즐기는 자이다. 마음에 평화가 깨지며 희로애락의 물결이 출렁이는 것은 마음 밖의 것을 마음속에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얻는 쉬운 방법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결핍의 이유가 없어진다.

하늘은 비어있기에 만물을 담을 수 있고, 열매는 자기를 죽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비운 마음을 하늘의 마음이라 하고 하늘의 마음을 양심이라 한다. 양심이란 곧 욕심을 비운 마음을 의미한다. 마음의 그릇에 물욕과 증오 질시 등의 무가치한 감정들이 채워져 있게 되면 고귀한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진다. 때문에 영혼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마음속을 비우려한다.

글 : 박재근 전북흑염소협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