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15)/ 범피중류

2017-10-12     선산곡

 

범피중류(泛彼中流)

드디어 찾았다. 언젠가 나타날 것으로 믿고 있었던 쪽지 한 장이었다. 어딘가 잘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리란 것을 믿고 있었다. 명함크기의 아트지 쪽지에 쓴 몇 마디. 대충 헤아려보니 35년만인 것 같다.

 

비탈길.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산의 기운은 변함없이 팽팽하다. 오르건 내리건 산행은 항상 경건해야 한다. 관대하지만 용서가 없다는 외경심을 늘 자신에게 가르쳐야한다. 절대 자기의 힘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그날의 산행, 때는 가을이었고 나는 아직 청춘이었지만 연이틀 계속된 종주의 마지막 코스에 지쳐 걸음은 적지 않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일행과 함께 길턱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세석평전에서 노고단 쪽으로 내리는 길이었다. 바위틈에 핀 하얀 구절초가 산에 머문 구름 습도에 젖어 있었다. 때 마침 우리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오는 일행이 있었다. 잿빛 승복을 입은 젊은 스님 셋이었다. 지쳐 쉬는 우리를 스쳐 내려가는 길이었지만 그것도 불가의 인연이라 생각했을까, 건네준 가벼운 눈인사가 어색하지 않았다. 스님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범인들과는 다른 세속을 등진 수도자들이어선지 고행에 길들여진 빠른 걸음들이었다.
“망망(茫茫)한 창해(蒼海)이며 탕탕(蕩蕩)한 물결이로구나.”
흥얼흥얼 재색 승복 사이로 판소리 한마디가 흘렀다. 뜻밖이었다. 누가 이 지리산 중턱에서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바닷길 풍경의 장중한 흐름을 노래한 판소리 수궁가 ‘범피중류(泛彼中流)’의 한 대목이었다. 산에서 스치듯 들린 소리마디는 인생의 바다를 연상하듯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운해의 위, 산에서도 나는 바다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스님의 소리는 불경도 아니었고, 느린 진양조 박에 맞지도 않았고, 초보자의 가락으로 사설을 외우는 정도였다.
산에서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은 듯 잠시 내 마음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그 착각이 현실이었음을 나는 곧 깨닫기 시작했다. 망망함은 산이나 바다나 같은 것이었다. 감히 맞설 수 없는 산의 위용 앞에 지쳐 있었으면서도 건방진 성취감에 빠져 있는 내게 파도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말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다.
(까불지 마.)
물 위를 떠서 흘러가는, 말 그대로 범피중류의 작은 조각배에 지나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구례쪽 하산경로 때문에 제법 먼 길을 돌아 도착한 노고단에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이 축복 받았으면서도 불행을 껴안은 것은 그 높이에서도 많은 물이 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노고단 부근은 새로 생긴 일주도로로 상처를 입은 뒤였다. 경건함도 지워버린 채 행락에 가까운 사람들의 발길이 산 중턱까지 차를 타고 와 손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돼버린 것이다. 산이 지닌 혈맥의 기운이 뭇사람들을 끌어당긴다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일주도로 개설공사 반대서명을 해 놓고도 천연덕스럽게 차를 몰고 언젠가 이 산을 나도 가로지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노고단, 한 장소에 또박 또박 써 놓은 벽 낙서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흔적을 남겨 놓았으면
깨달음의 실마리로 삼았을 텐데
아쉽다
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
그리고 뒤돌아보지 마라

어쩌면 절규 같은 이 문장을 나는 쪽지에 옮겨 적었다. 이 글을 벽에 남긴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사람은 산의 어떤 흔적을 기대한 것일까. 저 깊은 산 어느 곳으로 몸을 감춘 한 스님이 불러온 바다처럼, 인생의 걸음을 생각하는 상통(相通)의 울림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뉘라서 산의 정상에 올랐다하여 그 산을 정복했다할 수 있었으랴. 산에 대한 목적을 갖지 마라, 물결을 거스르지 마라, 어리석은 짓이니라. 인생도 그처럼 뒤돌아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35년 만에 그 낙서를 적은 쪽지가 내 앞에 있다. 이 말이었구나. 이 낙서를 해 놓은 사람도 지금 나처럼 바다와 같은 인생의 길 위에 떠있겠지. 돌아보지 않기로 하며 가라고 했던 그는 어떤 흔적을 찾아 어디로 흘러갔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범피중류, 지금 나는 어디에 떠 있는 것일까. 또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