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속시한줄(5) 무등을 보며

글 그림 : 조경훈 시인 한국화가             풍산 안곡 출신

2018-03-22     조경훈 시인

 

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 빛의 등성이를 들어내고 서있는 / 여름 산 같은 /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 청산靑山이 그 무릎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 오후의 때가 오거든 /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 더러는 앉고 /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 보고 /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 우리는 늘 옥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은 올망졸망하게 솟은 빈약한 한국문학사에서 빼어난 한줄기 봉우리를 이루어 내신 분이시다. 나는 미당 선생이 쓴 여러 명편의 시중에서 특히 ‘무등을 보며’를 암송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이유는 이 시가 우리 생활에서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와 살다보면 어찌 환희로운 일만 있겠는가. 때로는 가난으로, 전쟁으로, 이별로, 수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 것인 즉, 이때 잔잔히 시 한편으로 산에 여쭈어 대답을 해주고 있으니 풀잎처럼 흔들리며 사는 민초들이 위안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다.
미당의 사유는 이렇게 침잠을 벗어나 달관의 경지에서 상리과원(上里果園)의 시 속으로 이끌고 나를 그곳에서 살게 했다.
미당 시인이 이 시를 쓴 시기는 6ㆍ25 전쟁이 막 끝난 1950년대 중반, 광주 조선대학에 출강하셨던 40대이었는데 그 때에 관용과 배려로 자연에 귀의하는 달관의 심상을 가지셨다면 그 시맥이 얼마나 넓고 튼튼한가를 품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주사람들은 이 무등을 늘 바라보며 산다. 무릎아래 지란을 기르듯 새끼들을 기르고,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면 내외들이여, 더러는 앉고 더러는 누워 살자했다.
아! 얼마나 평화로운 사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