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ㆍ3바로알기②/ 3ㆍ1절 발포사건과 탄압

2018-09-06     한상희 연구사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는 2만 5천~3만 명이 모여들었다. 제28주년 3ㆍ1절 기념행사에 참여해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이기 위해서였다. 제주도민들은 해방이 되어도 좋은 세상이 오지 못한 이유는 여전히 외세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또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외세 때문에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쪼개질 것 같다는 걱정도 들었던 것이다.
기념대회가 끝나고 통일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오후 2시 45분 쯤,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있었다. 기마경관이 말굽에 치인 어린이를 그대로 둔 채 가버리려 하자 일부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기마경관을 쫓아갔다. 당황한 기마경관은 군중들에게 쫓기며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는데,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국민학생, 아기를 안은 아낙네, 농부 등에게 가해진 경찰의 총격은 제주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제주도민들은 총을 쏜 경찰과 경찰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희생자들에 대하여 피해를 보상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끝까지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도민들은 3월 10일부터 총파업을 시작했다. 제주도내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95% 이상이 파업하였는데, 166개 기관·단체에서 4만1211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그런데 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은 느닷없이 3ㆍ1절 발포사건을 좌익의 배후조정에 의한 폭동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3ㆍ1절 발포사건에 대하여 항의하는 제주도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미군정 경찰은 제주도민의 의견을 듣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은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억압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미군 조사단이 떠난 다음날인 3월 14일, 미군정 경찰 총수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에 왔다. 조병옥은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며 뜬금없이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붙였다. 조병옥이 제주에 온 이튿날에는 전남 응원경찰 122명, 전북 응원경찰 100명이 제주도로 들어왔다. 이북 출신으로 구성된 반공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도 대거 들어왔다. 이들은 제주도 전역에 걸쳐 삼엄한 경계망을 펴면서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미명 아래 주민들을 연행하고 고문하여 제주를 공포와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갔다. 이 과정에서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고, 1948년 4ㆍ3 무장봉기 직전까지 1년간 무려 2500명이 잡혀갔다. 급기야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도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3ㆍ1절 발포사건과 총파업, 이어진 청년들에 대한 대량 검거사태로 제주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다. 특히 3ㆍ1절 발포사건 직후 대거 제주도에 내려온 서북청년회(서청)는 한자로 ‘서북’이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다니며 자금 모금을 한다는 구실로 태극기나 이승만의 사진 등을 주민들에게 강매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1947년 말부터는 경찰과 행정기관, 교육계에 들어가는 서청단원들이 늘어났고, ‘좌익 척결’ 이란 이름 아래 서청에 의한 탄압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서청의 탄압은 도민들로 하여금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경, 오름 정상에 붉게 타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와 경찰·서북청년회 단원의 숙소 등을 공격하는 무장봉기가 벌어졌다. 그들의 무기는 대부분 죽창이었고, 소총은 한 무리에 한 두 자루 정도가 전부였다.
무장대는 봉기의 명분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는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에 함축되어 있다. 둘째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해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4ㆍ3 무장봉기가 일어난 때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인 5ㆍ10 총선거(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저항하고, 나라를 분단시키는 선거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5ㆍ10총선거의 성공적 실시를 목표로 삼은 미군정은 4ㆍ3 무장봉기에 강도 높은 대응을 하게 된다. 미군정은 경비대 병력을 증강하고 본토 경찰 1700명과 서청 단원 500명을 제주로 보냈다. 그러나 응원경찰 등에 의한 강경한 진압작전은 오히려 민심을 자극시켰고 많은 도민들이 산으로 피신하는 계기가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