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41)/ 만추

만추(晩秋) - 슬픔에 대하여

2018-11-14     선산곡

 

건널목을 건넜다. 다섯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 도심이었다. 두 줄로 선 나무들 틈에 깔린 포도(鋪道)의 공간이 작은 공원처럼 아늑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옆인데도 나무들 허리에 걸린 플래카드가 사람들의 시선이 막아주고 있는 탓이었다. 그 작은 숲 나무들이 옷을 벗기 시작하고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 얼마 전 내린 비에 잎사귀들은 한꺼번에 져 내릴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포도위에 이미 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만추를 상징하는 형형색색의 조각들. 그 빛들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인쇄가 정교해지기 시작한 60년대 말의 잡지화보를 본 기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빛바랜 스크랩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잎사귀들이 발길에 차여 소리를 낸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나무아래 놓인 벤치에 앉았다.
낙엽을 내려다보다가 그 옛날을 생각했다. 그 시절, 이처럼 짙은 가을이면 우리들은 헤어지기 싫어 몸부림을 쳤었지. 밤이 길었을까, 통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방황했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었던 그때의 고통들. 가난했어도 그 때가 좋았지. 좋았던 나날이었지.
<도즈 워 더 데이즈>(Those Were The Days)란 노래가 있다. <지나간 시절>, <좋았던 시절>, <가버린 날들>, <그리운 시절> 등 이 노래 제목에 대한 번역은 가지가지다. 그러나 모두 같은 말이다. 아팠건 쓰라렸건 지난날은 모두 좋았던 한 시절의 꿈이다. 그 노래를 들을 때면 지난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러시아 민요인 <머나 먼 길>을 웨일스 출신 메리 홉킨스가 번안하여 불러 유명해진 곡이다.
옛날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지
우린 거기서 술잔들을 부딪치곤 했네
웃으면서 지낸 시간들
우리가 했던 말들의 그 기억들

 

세월은 흘렀고
그 때의 희망도 미래의 설계도
이젠 끝나버린 과거가 되었지만
저 조락의 빛들은
그때의 선택을
지금 어떻게 증명해주고 있을까.

오늘 밤 그 선술집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네
눈에 익은 것들은 보이지 않고
유리창에 비친 낯선 실루엣 하나
이 외로운 모습이 나였구나.

사람들은 지나가지 않았다. 오래도록 혼자 앉아있었다. 노랫말처럼 유리창에 비친 지금의 내 모습을 나는 안다. 세월은 그렇게 지났다. 낙엽의 빛깔을 바라보며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때 아니게 나는 울었다. 그 깊은 오열의 맛, 오랜만에 흘려본 눈물이었다. 새삼스러운 서러움이었다. 더불어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했다.
올가을 단풍은 그 어느 해보다 아름다웠다. 한여름 폭염 때문에 곱게 물들지 않으리란 예측의 값에 비례하는, 어떤 선입견도 없었다. 다만 지난날 회상을 껴안은, 아름답지만 슬픈 만추였음을 조락(凋落)의 빛들이 새삼 확인해준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