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4) 1965년의 대중가요와 한국사회

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4)

2019-07-17     림재호 편집위원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한국과 일본이 해방 및 패전 20년 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양국 간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대일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독립 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 3억 달러에 일제 36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배상문제를 마무리한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이고도 졸속적인 한일국교정상화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각종 침략조약의 원천무효, 그리고 정당한 배상도 받지 못했다. 지금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우기고, 성노예(위안부) 문제, 한국인 강제노동자 임금체불 문제 등에서 억지를 부리면서 1965년 한일회담에서 모두 해결됐다고 잡아떼는 것은 잘못된 한일회담이 남긴 업보이기도 하다.
1965년은 국군의 첫 전투부대 베트남전 파병이 실시되었고,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과 박수근 화백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1965년의 영화

이 해에 개봉한 한국영화로는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갯마을>, 유현목 감독의 <춘몽>,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이 화제였다. 이윤복의 수기(手記)를 영화화한 작품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온 국민을 울렸고, 신영균ㆍ고은아 주연의 <갯마을>은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커다란 조류라고도 할 수 있는 문예영화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영수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때 묻지 않은 자연풍광을 잘 잡아낸 뛰어난 영상미와 어촌마을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유현목 감독의 <춘몽>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외설논란에 휘말린 작품으로, 문제가 된 영화 속 장면은 여배우가 꿈속에서 도망치는 장면에 뒤태가 노출된 6초가량의 컷이었다. 재판부는 유 감독에게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했다.
외국영화로는 <도레미송>, <에델바이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영화로 꼽힌 <사운드 오브 뮤직>이 있었고, <닥터 지바고>도 영화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영화 <남과 북>과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영화 <남과 북>은 한운사의 라디오 드라마 <남과 북>(1964년 10월, 30분씩 28회, KBS라디오)을 1965년 김기덕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이해로 대위(최무룡)의 부대에 인민군 장일구 소좌(신영균)가 귀순해온다. 귀순한 이유는 헤어진 연인을 찾기 위해서다. 그가 내민 사진을 본 이 대위는 장  소좌가 찾는 이가 바로 자신의 아내 고은아(엄앵란)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이 대위는 정보참모(남궁원)에게 장 소좌를 넘기고, 장 소좌는 인민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고은아를 만난다. 결국 그녀가 이 대위의 아내인 것을 안 장 소좌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의 사랑을 단념한다. 이 대위는 일선근무를 자원했다가 전사하고 장 소좌도 이 대위를 죽인 인민군을 저주하다 벼랑에서 몸을 던진다.
한국전쟁을 다룬 대부분의 전쟁영화가 남북한의 이념 대립을 다루며 전우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비해, 이 영화는 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세 남녀의 운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남과 북>은 이분법적인 반공영화를 넘어선, 비평계와 대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사로잡은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모두 주제가로 초대됐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작곡가 박춘석이 만들고 신예 가수 관순옥이 불러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른 가수 곽순옥은 영화 <남과 북>이 나오던 즈음에 홍콩으로 떠났고, 1970년에 미국에 정착해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을 무대나 방송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노래는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어 불길처럼 번지며 생방송이 연장에 연장을 거듭할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며 이산가족 상봉의 대명사가 되었다. 당시는 패티김의 노래가 전파를 탔다.

 

1965년의 대중가요

이 해에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인기가요로는 이미자의 <울어라 열풍아>와 <홍콩의 왼손잡이>, 박재란의 <산 너머 남촌에는>, <소쩍새 우는 마을>, <진주 조개잡이>(번안곡), 김상희의 <울산 큰애기>가 있다.
은방울자매의 <삼천포 아가씨>와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도 지금까지 애송되고 있고 <보슬비 내리는 거리>(성재희)와 <내 이름은 소녀>(조애희)도 눈길을 끈 노래들이다. 정시스터즈의 번안곡 <새드 무비(슬픈 영화)>, <워싱턴 광장> 등도 인기를 끌었다.
남자가수들의 노래로는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 칠 때>와 김상국의 <불나비>와 <쾌지나 칭칭나네>, <추풍령>(남상규), <맨발로 뛰어라>(남일해), <뜨거운 침묵>(최희준) 등이 있었다.
 

봄의 명곡으로 사랑받는 <산 너머 남촌에는>

 

대표적인 ‘봄의 명곡’ 중 하나인 박재란이 부른 <산 너머 남촌에는> 가사는 1927년 1월 《조선문단》 18호에 발표된 파인 김동환 시인의 시를 사용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동환 시인의 이 가사는 가요뿐 아니라 1979년 김규환이 작곡한 가곡 <남촌>으로도 많이 불린다. 또한 2001년 박영사에서 발간한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가요와 가곡 악보가 함께 실릴 만큼, 오늘날까지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보슬비 오는 거리>의 성재희

 

어느 날 갑자기 혜성같이 나타난 성재희란 여가수가 <보슬비 오는 거리>를 불렀을 때 세인들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여자의 목소리가 저렇게 남자도 감히 나오기 어려운 저음을 낼 수 있느냐고. 
그런데 인기절정을 달리던 성재희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러자 세간에서는 온갖 설이 난무했다. 미혼 가수로 알고 있었던 인기 절정의 성재희는 사실 취입할 당시에 가정주부였으며, 다만 노래를 너무 좋아했기에 남편에게 딱 한 번만 취입하고 그만둔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자신의 노래가 히트 해 스타가 되었으면 계속 가수 활동을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일 텐데, 성재희는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고 가요계를 떠나 종적을 감추게 된다. 성재희는 53년만인 작년 12월 말일에 한국방송(KBS1) <가요무대>에 출연해 자신의 대표곡 <보슬비 오는 거리>로 무대에 올라 70대 나이를 잊은 열창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