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7) 축령산 편백림 조성 ‘한국 조림 선구자’ 임종국

순창인물열전 (18)

2019-09-25     림재호 편집위원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을 경계로 노령 지맥 위에 솟아 있는 축령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편백숲 덕분이다. 축령산 편백숲은 산림청이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했을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숲을 배경으로 영화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드라마 <왕초>도 촬영됐다. 축령산 숲은 한 사람이 만든 숲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헐벗었던 산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숲을 사랑한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대한민국 조림왕’으로 불리는 임종국이다.

 

복흥 동산 출생, 순창중 중퇴

 

임종국(林種國)은 1913년 1월 19일 복흥면 조동(현 동산리)에서 임영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복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순창농업중학교(현 순창중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때 부친과 상의한 후 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군산으로 가 일본인 스끼다가 운영하는 미곡상에 취직해 몇 해 뒤에는 살림을 도맡는 전무에 오르게 된다. 해방 전 처가가 있는 전남 장성군 장재마을로 이주했다. 양잠과 특용작물을 재배하며 제법 짭짤한 농가소득을 올리며 생활했다. 그는 농사일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고, 돈도 벌면서 영농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인생을 바꾼 편백나무 숲

그러던 어느 날 임종국은 엄청난 풍경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장성군 덕진리에 있는 동아일보 창립자인 인촌 김성수 소유 야산에 자라고 있는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보게 된 것이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도열해 바다처럼 넘실대고 향긋한 나무 내음, 나무 사이에서 부는 소슬바람의 모습에 넋이 나간 임종국은 숲의 가치를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잘생긴 나무들은 임종국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 임종국은 봄부터 본격적으로 조림을 시작했다. 일단 자기소유 임야 1헥타르(㏊, 약 3000평)에 삼나무 5000본을 시험적으로 심었다. 나무들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자 자신감을 얻은 임종국은 조림사업에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양잠을 통해 번 돈에 집과 논밭을 판돈까지 조림사업에 바쳤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빚을 내가며 자기 소유지뿐만 아니라 국유림에도 나무 심기를 계속했다.

100년 농사 조림…‘불굴의 신념’

임종국은 1980년 4월5일 <매일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농림부에 파견돼 있던 미국 고문단들이 ‘무서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산의 황폐화로 토사가 밀려와 전 농토가 폐허화되는 일’이라고 했다. 나 혼자만이라도 그런 사태를 막아보자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나무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사람도 없었고, 나무를 키우기 위해 준비된 도구도 없었다. 수리시설이 허술해서 홍수가 일어 묘목이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가뭄에 묘목이 타죽기도 했다. 먹을거리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조림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감행한 것을 본 주위 사람들은 시절 좋던 고구마 농사를 떠올리며 고생을 사서 하냐며 빈정대기도 했고, 열매도 없는 나무에 물을 주기는 왜 주냐고 타박도 했다.
그러나 임종국은 나무를 심는 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민둥산을 그냥 내버려두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쌀농사는 한 해 농사요, 나무 농사는 100년 농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임종국은 지난한 시절 편백나무 140만6000그루, 삼나무 63만4000그루, 밤나무 5만400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피투성이로 가뭄 이겨내며 가꾼 숲

 

조림사업에 대한 임종국의 집념 가운데 지금도 회자되는 일화가 있다. 1968년은 기록적인 가뭄의 해로 유명하다. 전국에 몰아닥친 극심한 가뭄으로 벼와 밭작물이 말라죽어 갔다. 호남 지역은 특히 피해가 컸다. 그가 조림한 나무들도 하나 둘씩 말라비틀어져갔다.
임종국은 물을 구하기조차 힘든 가뭄 속에서 물동이를 지게에 지고 험한 산자락을 올라 물을 퍼붓고 또다시 내려와 물을 채워서 산을 탔다. 보다 못한 가족들도 함께 물지게를 졌다. 그와 가족들의 어깨는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온갖 정성을 쏟아 부어 나무들을 가꿨다. 처음에 냉소적이던 마을 사람들도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밤이고 낮이고 물을 뿌려줘야 했는데, 머리를 맞댄 마을 사람들 일부는 물지게를 들고 일부는 횃불을 들고 산에 올랐다. 산허리를 수놓은 횃불 사이로 나무를 살리는 물길이 흘렀으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죽어가는 나무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축령산 숲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조림사업은 1976년까지 계속됐다. 꼬박 20여 년간을 헐벗은 산 570㏊에 28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가꿨다. 여의도보다 두 배 가까이 넓은 규모다. 1972년 그가 5ㆍ16 민족상을 받을 때 자료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71년까지 그의 투자비는 총 7370만원으로 평가돼 있다. 10년 자란 나무 한 그루가 1000원 하던 시절이니 엄청난 투자를 한 것이다.

산림정책에 영향…산림녹화사업

임종국의 조림에 대한 열정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전국가적 운동으로 유발하는 촉매역할을 톡톡히 했다. 숲에 대한 그의 열정이 본보기가 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본격적인 산림녹화사업을 추진했다. 그 이전에는 산지나 해안의 사면이 붕괴되는 것을 막는 사방사업이 우선이었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식산포장, 1970년 철탑산업훈장, 1972년 5ㆍ16 민족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임종국은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평생을 바친 숲과 결국 이별하게 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1976년 빚에 몰려 이를 넘겨야 했다. 이후 속을 끓이다가 1987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울분의 10여 년을 보낸 뒤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는 외쳤다고 한다.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다.”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

산림청은 2002년, 임종국의 혼이 서린 숲의 상당 부분을 사들였다.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와 북일면 문암리 일원 258㏊의 ‘임종국 조림지’를 김아무개(69) 등 소유주 9명으로부터 40억6800만원에 매입했다. 임종국이 가꾼 숲 570㏊의 일부이기는 했지만 그가 소망했던 대로 국민들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국립 휴양림으로 돌아온 것이다.
임종국은 그가 평생을 가꾸었던 축령산 숲에 묻혀 있다. 복흥면 선산에 있던 그의 묘를 지난 2005년 수목장으로 이장한 것이다. 산림청은 2001년 그의 공로를 기려 국립수목원내 ‘숲의 명예전당’에 업적을 새겨 헌정했다. 임종국(林種國)은 이름부터가 숲과 연관이 있다. ‘나라(國)를 위한 숲(林)의 씨앗(種)’이다. 그는 그 이름대로 숲을 위해 살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