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19) 1974년, 긴급조치 시대…포크송 광풍의 해

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19)

2020-02-26     림재호 편집위원

 

박정희 정권은 1월 벽두부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긴급조치를 선포하며 민주 세력을 강경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1월 8일,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대학가의 반유신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특히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과 관련 단체 가입과 활동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ㆍ구속ㆍ압수ㆍ수색해 비상군법회의에서 형사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호에 의거 장준하ㆍ백기완에게 15년 형을 언도하고, 4호에 의거 이철ㆍ김지하 등 9명에게 사형을, 21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건 관련자 140명 형량 총합이 무려 1650년에 이르는 이성을 상실한 폭거였다. 
이에 대학가ㆍ재야ㆍ일부 종교계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9월), 전국 규모 재야단체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12월),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대한 투쟁(12월) 등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처절한 항전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신중현과

1974년 대중문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1974년은 포크송이 대중음악계를 장악한, ‘포크송 광풍’이 휘몰아친 해였다. ‘7080음악’ 하면 떠오르는 대부분 노래가 바로 이 해와 이듬해에 탄생한 노래들이다. 어니언스ㆍ김정호ㆍ송창식ㆍ윤항기ㆍ김세환ㆍ4월과5월ㆍ박인희ㆍ양희은ㆍ이연실ㆍ은희 등 포크가수들의 노래가 방송과 음반시장을 장악했다. 여기에 영화 <별들의 고향>이 관객 동원에 대성공하면서 1974년은 ‘청년문화’에 대한 논쟁이 치열한 해이기도 했다. 

포크 대중화 주도한 어니언스 

‘편지’를 소재로 한 대중음악은 부지기수다. 1960년대에는 김상희가 부른 <편지>(원곡 파란 손수건)와 <마지막 편지>(조영남)가 있었고, 70년대에는 <마지막 편지>(이수미)와 <가을편지>(최양숙), 80년대에도 <눈물로 쓴 편지>(김세화)와 <백지로 쓴 편지>(김태정) 등이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 2013년에도 음원 차트 1위에 오른 다비치의 <편지>가 있었다는 것은 세월과 무관하게 ‘편지’가 갖는 낭만적 파괴력을 말해준다. 이 가운데 압권은 어니언스 <편지>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당시 청춘들은 가사처럼 곱게 써 내려간 편지를 말없이 건네고, 그것을 받은 상대는 그만 울어버리는 ‘순정’세대요, ‘편지’세대였다. 
어쩌면 어니언스의 <편지>는 제목에서 이미 전국적 히트를 예약했는지도 모른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1974년은 한 마디로 ‘어니언스의 해’였고, 어니언스가 부른 <편지>는 당시 전파를 완전 독점한 노래였다. 
어니언스는 1973년 혼성 3인조로 데뷔해 곧바로 임창제와 이수영의 남성 듀오로 재편되었다. <사랑의 진실>을 시작으로 <작은 새>, <저 별과 달을> 등이 연속 히트하면서 1년도 채 안 돼 가뿐히 스타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임창제가 작곡한 <편지>의 대히트로 한국방송ㆍ문화방송ㆍ동양방송 방송 3사 연말 가요대상에서 중창 부문과 대상을 독식했다. 
통기타 연주 위주의 초기 포크송과 달리 <편지>는 도입부의 처연한 바이올린 연주로 선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등 편곡의 풍성함이 가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포크송을 듣게 했다. <편지>는 일부 대학생에게만 애송되던 포크송을 10대와 기성세대에게도 확산시켜 ‘포크의 대중화’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노래였다. 

한국적 포크를 지향한 김정호

어니언스가 인기를 얻고 나서 그들의 히트곡 <사랑의 진실>ㆍ<작은 새>ㆍ<저 별과 달을> 등을 작곡한 김정호에게도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그 관심을 받아 김정호는 1974년 <이름 모를 소녀>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이름 모를 소녀>는 김정호가 총각 시절 아내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던 감정을 스케치한 명곡이다. 이후 <하얀 나비>ㆍ<잊으리라>ㆍ<꽃잎> 등을 발표하며 한국적 포크를 지향했다.
김정호의 재능은 외가에서 물려받은 듯하다. 서편제 명창이자 창작판소리의 창시자인 월북 소리꾼 박동실이 그의 외할아버지다. 박동실은 월북으로 인해 판소리사에서 그 존재가 한때 묻혔지만, 명창 김소희와 박송희 등을 키워낸 인물이다. 김정호의 어머니인 박숙자는 아들이 6살 때 집 안에 있던 국악기를 모두 내다 버렸다. 심지어는 가야금 줄까지 모두 끊어버렸다. 힘들고 고된 악극단 생활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정호는 운명처럼 ‘금지된 길’을 걷는다. 그리고 삶의 전부를 걸어 음악에 몰입했다. 지독히도 가난하게 자랐던 그의 노래에는 그만이 낼 수 있는 슬픔이 묻어 있다. 그의 슬픔은 다른 가수들이 노래했던 슬픔과 달랐다. 이별의 슬픔도, 가족과 헤어져서 슬픈 것도, 고향을 떠나 슬픈 것도 아니었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 놓고’란 가사로 시작하는 <이름 모를 소녀> 같은 곡에서, 슬픔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서도 슬픔과 외로움의 정서를 자아낸 가수가 김정호였다.
1976년 1월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 모든 음악적 활동을 금지당했다. 1980년 정부의 금지령이 풀려 <인생>을 발표하며 재기를 시도했지만, 이번엔 폐결핵이 그를 막았다. 인천에 있던 요양소에 입원했다. 의사가 “6개월이면 완치될 수 있다”고 진단했으나 그는 4개월 만에 요양소를 뛰쳐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꾸 노래하면 폐결핵이 심해져 죽는다”는 의사의 경고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 같다”고.
결국, 1985년 11월 29일, 김정호는 50여 곡을 남기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투병 막바지에 녹음한 노래 <님>은 꼭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한(恨)을 토해내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애절하다. 

<미인>, 3000만의 애창곡이 되다

펄시스터즈와 김추자, 김정미 등을 발굴해 한국대중음악에 소울과 사이키델릭 음악 열풍을 몰고왔던 신중현. ‘신중현과 엽전들’이라는 록밴드를 결성해 신중현이 직접 노래한 <미인>은 ‘3000만의 애창곡’이라는 영예를 획득한,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록 음악 성공작이다. 5음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쉽고 간결한 리프(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주제 선율)와 장타령 조의 신명을 자아내는 드럼 연주, 가야금의 농현(弄絃)을 연상시키는 전기기타의 실험적인 연주는 미취학 아동부터 노년층까지를 록 음악의 흥겨운 파티로 초대했다. 
당시 엘피(LP) 레코드의 재료는 석유화학 부산물이었는데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유가 상승은 이제 갓 걸음마를 떼고 있던 한국 음반 산업마저 얼어붙게 했었다. <미인>의 성공은 이 구조적인 불황을 단숨에 분쇄해 음반 산업에 열기를 불어넣는 활력소 구실을 했다. 아울러 음반 시장에서 천대받던 한국 록 음악이 비로소 예술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이용복 <어린 시절>

문화방송(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수상하는 등 1970년대 초반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시각 장애인 가수 이용복은 번안곡도 즐겨 부른 가수였다. 그의 최대 히트곡인 <어린 시절>은 클린트 홈즈의 <Playground in My Mind>를 번안한 곡이다. <어린 시절>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삽입한 것까지 똑같이 원곡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불렀다. 두 곡 모두 듣고 있으면 저절로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