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속시한줄(54) 봄은 고양이로다

글ㆍ그림 : 아원(兒園) 조경훈 시인ㆍ한국화가, 풍산 안곡 출신

2020-04-08     조경훈 시인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1924)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별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송이보다 더 아름다워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哀求)의 정이 눈물겨웁고
주린 식욕이 입을 벌리도다.
이 무심한 식욕
이 복스러운 유방 ……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러지이다
푸른 하늘에 날러지이다

1924년쯤, 기나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볕이 쏟아지는 초가집 뜰 방에 22세 된 청년이 앉아 있습니다. 마침 그 청년을 보고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하고 곁으로 다가옵니다.
다가온 그 고양이를 만져보니 털이 꽃가루처럼 부드럽습니다. 고양이의 커다란 눈을 보니 호동그란 금방울 속에 불길이 흐르고, 마주 앉아 서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따스한 봄볕에 졸음이 옵니다. 그러나 잠든 것은 아닙니다. 날카롭게 뻗은 고양이의 수염은 푸르름이 돋아나는 봄의 생기를 어루만지며 뛰어놉니다. 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고양이가 되어 곁에 와있습니다.
그 청년은 조용히 일어나 푸른 하늘을 봅니다. 그 하늘 속에 어머니 유방처럼 생긴 낮달이 떠 있습니다. 그 불룩한 유방은 이슬 맺힌 포도송이보다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유방으로부터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합니다. 내가 아가 때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빨던 아주 편안했던 세상을 생각하면서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지나갔고, 지금 곁에는 어머니가 없습니다. 젊은 청년은 하늘을 향해 외칩니다.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려지이다. 푸른 하늘에 날려 지어다.’
이 젊은 청년은 그 때에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현대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즈음, 아주 젊은 나이로 음독자살을 합니다. 시인이라는 이름도 변변히 듣지 못하고 아깝게 세상을 떴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시를 읽고 봄이 되면 생각나서 만납니다.

■ 이장희(李章熙ㆍ1902~1928) 대구 출생
1925년 <조선문단>을 통해 문단에 나옴.
백기만이 역어낸 <상화>ㆍ<고월>에 시 11편이 실려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