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순 홍성연 씨의 육남매 이야기

부장판사의 어머니 “육남매 뒷바라지 못해 가슴 아파” 동계 서호마을

2021-03-24     최육상 기자

 

경희대 학생들이 (순창에) 농활(농촌활동) 왔을 때 설문지 작성 좀 도와줬더니, 어떻게 농민회 회원이 돼 가지고, 농민회를 시작했어요. 1990년도죠. 우리 쌍둥이 큰딸들이 1990년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라 기억나요.”

지난 5일 순창군여성농민회 정기총회에서 만난 김필순(74·동계 서호마을)씨가 밝힌 농민회 활동 계기다.

홍성현김필순의 여식 홍◯◯ 부장판사 승진 축하

 

최근 동계면과 읍내터미널 등 곳곳에는 서호리 홍성현김필순의 여식 홍◯◯ 부장판사 승진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홍 부장판사는 김필순 씨의 넷째 딸이다. 그를 잘 아는 한 주민이 귀띔했다.

판사 자식 있는 건 권력이야. 시골에선. 부장판사 승진은 대단한 거지. 그런데 김필순 회장님은 자식 자랑을 전혀 안 하셔, 그렇게 겸손하실 수가 없어. 오래 전부터 농민회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시고.”

김필순 씨는 지인에게 부탁한 처음 취재 제안을 겸손한 성품대로 거절했다. 김 씨가 여농 총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에 무작정 찾아갔다. 대화는 총회 후 김 씨를 따라 걸으며 막무가내로 묻고, 마지못해 답하는 식이었다. 다행히, 김 씨의 치과진료까지 1시간가량 남아서 읍내터미널 대합실에 마주 앉았다. 지난 5일 대화를 나누고, 15일 오후 자택에서 김 씨와 다시 대화를 이었다.

그는 남원에서 태어나 스물두 살에 순창으로 시집 왔다. 순창에 산 지 52년째다. 김 씨는 자녀들이 어떻게 되느냐는 똑같은 질문을 몇 차례 받고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뗐다.

육남매인데, 여섯 모두 동계면에서 낳았어요. 딸이 다섯이고, 아들이 막내야. (아들 낳으시려고 딸을 줄줄이 낳으셨냐고 여쭙자, 대답 대신 허허허웃었다) 올해 큰딸이 쉰하나, 막내가 마흔이여.”

부장판사 딸 이야기를 듣고자 했는데, 예상 못한 육남매 이야기를 꺼냈다. 큰딸(1971년생)들은 쌍둥이다. 둘은 서울대와 서울시립대에 각각 진학했다. 셋째(1975년생) 경희대 약대, 넷째(1977년생) 한양대 법대, 다섯째(1980년생) 한양대 컴퓨터공학, 여섯째(1982년생) 중앙대 컴퓨터공학 등 동계면 시골 출신의 육남매는 모두 소위 말하는 서울의 명문대를 다녔다. 비결이 궁금했다.

아이들한테 공부하라고 잔소리 한 적이 없어요. 학원 보낸 적도 없어. 대학 가서는 일 원 한 푼 도와준 게 없어요. 자기들이 장학금 타고 용돈 벌고 그랬지. 지금껏 밥 한술 떠먹여 본 적도 없구만.”

옆에서 대화를 듣던 아버지 홍성현(81)씨는 아버님이 공부를 잘 하셨느냐는 질문에 정색을 했다. “나는 책가방도 한 번 안 싸 봤어. 아이들?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게 컸어. , 몰러.”

서울 명문대 다닌 육남매, 공부하라 잔소리 한 적 없어

대화를 하며 더욱 궁금해졌다. 김 씨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큰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딸은 뜻밖의 전화에 부모님과 동생들 이야기라며 잠시 머뭇거린 후에야 차분하게 말했다.

부모님이 정말 가난하셨죠. 동생들마다 태어난 집이 다 달랐을 정도였죠. 먹고 살기 힘드시니까 동계면 이곳저곳 계속 이사를 다니셔서. (공부 비결을 묻자) 학교에서 야간수업을 열심히 시켰죠.(웃음) 제가 맏이라고, 동생들한테 공부하라고 시킨 적 없어요. 저희 남매들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알아서들 했던 것 같아요.”

이쯤 되면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상투적인 답이다. 큰딸 첫째는 교사로, 장학사 근무 중이다. 둘째 강사, 셋째 약사, 넷째 판사, 다섯째와 막내아들은 같은 회사(유명 대기업)에서 근무한다. 큰딸 표현대로 알아서들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래도 청소년기에 육남매가 알아서 크지는 않았을 터.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느냐고 김 씨에게 물었다.

아이들 중고등학교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수업료가 1년에 4분기씩 꼬박꼬박 나왔으니까. 육남매 학교 보내느라 어려워가지고 농협에서 늘 대출 받고. 상환기일이 도래됐다고 농협의 노란 봉투가 날아오면 어찌나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겁이 났는지 몰라. 이번엔 또 어떻게 갚아야 하나, 노란색만 봐도 놀랐지.”

매일 밤 12, 경운기로 왕복 1시간 학교 오가

육남매 중 다섯은 동계면의 동계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김씨는 농번기에 낫으로 나락 베고 그럴 땐데, 아버지(남편)가 농사짓느라 골아 떨어졌다가도 경운기로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면서 학교에 데리러 갔다집에서 동계고까지 매일같이 경운기로 왕복 1시간이 넘게 오갔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큰딸들(큰딸둘째딸 쌍둥이)이 학교에서 밤 12시까지 야간수업을 했어요. 그 땐 교통수단이 없으니까, 아빠가 자다가도 밤 12시 시간 맞춰 일어나서 아이들 데리러 갔지. 그 때 아이들이 방송국에 사연 보내서,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어머니라고 편지를 써 갖고 상금을 받았어. 쌍둥이들은 그렇게 키웠고, 셋째부턴 다행히 학교에 기숙사가 생겼어요.”

큰딸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경운기로 매일 밤 학교를 오가셨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큰딸은 추억에 잠겼는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3 마지막 해에 매일 밤마다 아버지가 학교로 데리러 오셨죠. 근데 느낌이 좋더라고요. 늘 밤이면, 경운기 뒤에서 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동생과 같이 하늘에 반짝이는 별 세는 게, 힘들었다기보다는 참 좋았어요.”

김 씨는 육남매 중에서 넷째만 전주로 고등학교 유학을 보냈다. 셋째는 이미 동계고에 재학 중이었다고 쳐도, 밑에 동생 둘은 다시 동계고로 진학시켰다. 넷째만 편애를 한 것일까.

서울대를 들어간 큰놈이 어느 날 그래요. ‘엄마, 모교가 튼튼해야 대학 생활하기가 좋다, ‘(고등학교를) 시골보다 도시에서 나와야 편하다, ‘엄마가 조금 힘들더라도 전주로 보내면 어떻겠냐. 그래서 넷째를 전주 우석여고(현재 전북여고)에 보냈어요. 그랬더니 동생들 중학생 때부터 선생님들이 찾아와서 왜 타지로 보내느냐고 어찌나 성화를 부리던지. 가정 형편도 어려웠고, 동생들부터 다시 동계고를 갔어요.”

뜨거운 여름, 돈이 없으니까 선풍기 하나 못 사줬어

김 씨는 대화 내내 육남매가 마음 편하게 공부하도록 제대로 도와주지 못 한 게, 고생스럽고 안쓰러워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나도 그랬지만, 못 배운 게 한이 된 아버지가 어떻게든 자식들 고등학교까지는 공부시켜야 한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이지 밤잠 안 가리고 그렇게 일만 했다고 말했다.

육남매 모두에게 부모 노릇을 못했다는 자책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더욱 컸다. 넷째 이야기에서 특히 그랬다, 그는 이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1994~1996) 우석여고 앞에 개인집 하숙비가 월 20만원이더라고. 비용이 들고 힘들어도 어떻게든 하숙을 시키려고 했는데, 두 달 만에 옮겼어요. 학교 입구에 조그만 슬레이트로 된, 두세 명씩 자취하는 데가 있더라고. 여름에 내가 이불빨래 해 주러 가니까 그리 뜨거운 거야. 근데 돈이 없으니까 선풍기 하나를 못 사줬어.”

넷째는 지난 200345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26, 이른 나이였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달랐다. 대학 졸업 후에도 서울에서 혼자 공부하는 딸내미를 볼 때마다 김 씨는 “‘그냥 취업을 하면 어떻겠냐고 말렸다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회상했다.

“‘취업을 하면 세상 당당하게, 편하게 살 텐데 왜 이렇게 어려운 고시공부를 하면서 언니한테 전화해서 아쉬운 소리해가며 책값 타고, 언니도 힘들고 너도 어렵고,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 어떻겠냐고 그랬어요. 대답이 엄마, 제가 공부한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어. 쪼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러더라고. 그 때 딸내미한테 실망스런 이야기를 한 게 지금 생각해도 속상해.”

큰딸, “부모님이 못 배우셔서 아쉬움이 많으셨어요

큰딸에게 다시 물었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 해 줬다고 속상해 하시던데, 어떤 부모님이시냐고. 이번에도 큰 딸은 어렵사리 답변을 했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이 일도 해 보시고, 저 일도 해 보시고, 자식들이 많으니까. 살아보시려고 항상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어요. 엄마가 국민(초등)학교 밖에 못 다니셨고, 아버지도 못 배우셔서 아쉬움이 많으셨어요. 그런 마음이 느껴졌어요. 어머니가 조그만 거 하나, 별 하나, 꽃 하나 그런 걸 좋아하세요. 카톡을 알려 드렸더니 예쁜 꽃 사진 찍어 보내시고 그러세요. 자식들이 오순도순 예쁘게 살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사법고시에 합격한 딸은 결혼해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 김 씨는 시부모 이야기에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의외였다.

평소에도 시어머니와 자주 통화해요. ‘따님 잘 키웠다고 전화 자주 하시고. 일 있으면 그냥 애(딸 부부)들만 보내지 않고 ‘(딸 부부와 함께 살아서) 당신들만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항상 봉투()를 보내요. 그런데 또 딸은, ‘엄마, 제 걱정 마세요. 저는 여왕 대접 받고 사니까그래요. 딸이 시부모를 모시는 게 아니고, 사위가 큰 아들이라 시부모가 젊으셔서, 아이들 다 키워주시고 함께 살아요. 사돈이 그렇게 좋으실 수가 없어요.”

김 씨의 자택 거실에는 두 개의 커다란 액자가 마주보고 걸려있다. 막내딸 결혼식과 막내아들 결혼식 때 찍은 가족사진이다. 김 씨는 막내딸 이야기에 활짝 웃었다.

막내딸이 서울에서 결혼식을 했어요. 피로연 비용은 전부 양가에서 반씩 나누잖아요? 그런데 사돈이 저희들은 노후 대책 다 돼 있고 하니까 걱정 마시라, 이 돈은 안 받으신다고 돌려주시더라고요. 막내 딸 여우면서(결혼시키면서) 축의금으로 농협 부채를 싹 다 갚았어요. 그 뒤로는 빚이 없어요. 참말로 막내딸이 보물이에요. 보물.”

막내아들 결혼식 이틀 후 세월호 사고잊지 못해

김 씨는 의외의 말을 꺼내며 막내아들 결혼식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올해가 벌써 세월호 7주기, 맞죠?”라고 물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막내아들이 결혼한 게 2014414일이에요. 내가 아이한테 너 결혼한 년도는 생전 못 잊겠다고 그랬어요. 신혼여행을 보내고, 이틀 후에 세월호 사고가 났어요. 해맑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 죽었으니까, 막내아들을 여우고 정말 행복해 하고 있다가, 내가 얼마나 놀라고 가슴이 아팠겠어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막내아들 결혼식 가족사진 속, 홍성현김필순 부부가 육남매, 사위 다섯, 며느리 하나, 외손자외손녀 열둘과 함께 든든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 씨는 다섯 딸은 자녀가 두 명 이상씩인데, 막내아들만 아직 자녀가 없다육남매 모두 결혼시켜서 참말 행복하게 찍었는데, 세월호가 가라앉기 이틀 전에 찍은 거라 그런지 이상하게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미리 전화통화가 되지 않아 김 씨 자택으로 불쑥 쳐들어갔다. 김 씨 부부는 갑작스런 방문에 다음에는 꼭 미리 연락하고 오라고 배웅하며 별 다른 대접도 못 해서 미안스럽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강한 호기심이 생겨버린, ‘육남매와 함께 만나 뵙자고 인사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