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사람처럼' 채광석 시인
꽃도 사람처럼
채광석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는 걸
먼저 서고 나서야
편다는 걸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래왔다는 걸
이제야
안다
그까짓 화관(花冠)이 대체 무어라고
어느 봄 한 날
눈물겨워라
시간을 모아
제 허리를 만들고
시간을 세워
우주 한 장 밀어 올리는
저
공력이
순창 출신 채광석 시인은 개인적으로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선배다. 채광석 시인은 대학 재학 중인 23세 때 등단했다. '대학 재학 중 등단'이라는 수사는 화려함 그 자체다. 하지만 등단은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등과는 화려함의 결이 전혀 다르다. 채광석 시인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에 절필을 하고 줄곧 고뇌했다. ‘절필의 아픔’은 ‘산초 냄새’를 타고서 진하게 전해진다.
먹고 사느라 스무 해 넘도록 / 시를 쓰지 않았다 / 먹고 사느라 서른 해 넘도록 글만 짓고 살았다는 한 문형(文兄)을 / 여름비 내리는 정동극장 앞에서 만났다 / 근처 허름한 추어탕 집에서 / 허기를 먼저 채우기로 하였는데 / 흙냄새 비릿한 추어향보다 / 그의 문향이 먼저 코를 찔렀다 / 저절로 주눅이 드는 건 / 내 몸에 배인 / 잡인의 냄새 때문이었을 게다 / 산초만 자꾸 치는 내게 / 그가 웃으며 말했다 / 아우, 너무 많이 치면 안 좋다네. / 밥집을 빠져나와 / 비에 젖은 정동 길을 좀 걸었는데 / 흰 자작나무 밑 그가 담배 한 대를 권하며 / 자작나무처럼 웃더니 / 이제라도 시 짓고 사세나, 했다 / 여름비에서는 자꾸 산초 냄새가 났다 (‘산초 냄새’ 전문)
시인이 50대가 되어 펴낸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문학의 숲)의 시집 제목이 된 ‘꽃도 사람처럼’은 20대에 화관을 쓰고 등단한 뒤 생업의 전선을 돌고 돌아 27년 만에 다시 시인으로 선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일 듯싶다.
시집은 1968년생으로서 ‘60년대생, 80년대 학번, 50대 나이’의 '586세대'로 불리는 시인이 그러했듯 시대를 함께 아파하며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묵직한 고뇌와 성찰로 가득 차 있다.
※이 기사는 최육상 기자가 〈오마이뉴스〉에 지난 2019년 2월 15일에 쓴 “문학병 도지면 우리 식구 다 굶어 죽는다” 기사를 수정, 보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