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속시한줄(74) 성탄제-김종길

글ㆍ그림 조경훈 시인ㆍ한국화가

2021-12-01     조경훈 시인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고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1926년경 겨울 눈이 내리는 어느 안동 고을에 아가가 아팠다. 아마 한 번쯤은 꼭 겪어야 하는 홍역을 치르고 있을 듯싶다. 그러나 그것에는 의원도 약방도 없는 시골 산골 마을이다. 다만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있었다.

그 때 이윽고 눈 속을 헤치고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 그것은 아버지가 전해오는 열일 내리는 약이다. 그 아가는 산수유를 끓인 물을 먹고 아버지의 차가운 옷자락에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면서 살아났다.

그날밤이 어쩌면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제처럼 환희로운 날이었을지 모른다 했다. 이 아가가 어느덧 30년이 지나면서 자라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1955년에 이 시를 써서 세상에 내 놓았다. 참으로 시인은 다르다.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사는 철없는 그 아기 때를 어찌 기억하고 이 시를 썼다는 것인가?

옛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 / 이제 반가운 옛날 것이 내리는데 //

그 때 아버지가 가져온 산수유 열매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를 아버지 앞으로 달려가게 하고 있다. 눈 오는 겨울과,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 그리고 나와의 만남. 참으로 절창의 노래다.

김종길(金宗吉) 1926~2017. 경북 안동 출생. 시집에는 <성탄제> <하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