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숨겨진이야기(8) 작곡가 임종수, 트로트 신동·가수에서 국민작곡가로 거듭난 사연

2022-01-19     림재호 편집위원
케이비에스(KBS)

 

순창이 배출한 작곡가 임종수는 현존하는 트로트음악계의 최고봉이다. 1972<고향역>(나훈아)을 성공시킨 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하수영), <대동강 편지>(나훈아), <옥경이>(태진아), <부초>(박윤경), <착한 여자>(인순이), <남자라는 이유로>(조항조), <모르리><빈 지게>(남진), <애가 타>(장윤정), <아버지의 강>(강문경) 등 주옥같은 명곡을 발표했다.

 

트로트 신동명 카수

 

그는 1942년 순창읍에서 부친 임응규와 모친 서창옥 사이에서 5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순창초등학교(44)를 졸업한 후 둘째형이 살던 이리에서 남성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다섯 살 유년시절부터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외워 구성지게 부르던 노래 신동이었다. 초등학교 봄가을 소풍 장기자랑 시간은 그의 독무대였고 그때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은 시작됐다. 청년시절 애칭은 명 카수’. 1960년대 초 당시 유행처럼 열렸던 순창 콩클대회마다 1등을 휩쓸어 임종수가 나오면 나는 안 나간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귀래정에서 발성 연습

 

이리 남성고를 졸업할 무렵 전주시 공관에서 국제레코드사 전속가수 모집 오디션이 열렸다. 그도 결선에 올라 발표를 기다렸는데, 그때 들은 초대가수 남백송 노래에 큰 충격을 받는다. ‘, 내가 오늘 합격한다고 해도 지금 목소리와 실력으로는 가수 되는 게 택도 없겠구나.’ 발표를 듣기 전에 나와 순창행 막차를 탔다.

다음날부터 발성 연습을 시작했다. 아침 9시 이전에도 못 일어나던 잠꾸러기가 탁상시계를 5시에 맞춰놓고 기상해 매일 남산마을 귀래정에 올랐다. 보름쯤 소리를 질러대니 목이 쉬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쉬지 않고 6개월 동안 발성 연습을 계속했다.

 

배호도 알아준 노래 실력

 

1962년 한국방송(KBS) 광주방송국과 전주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19634월 수도육군병원에 복무 중이던 이등병 시절. 그는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문화방송 주최 톱싱어대회연말결선에 군복을 입은 채로 참가했다.

그는 현인의 <꿈이여 다시 한 번>을 불렀는데, 그때 악단이 김광빈악단이었다. 그 중 모자를 쓰고 드럼을 치는 사람이 임종수만 보면 항상 군인 아저씨, <꿈이여 다시 한 번>” 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무명시절의 가수 배호였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가창력이 뛰어난 것으로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는 배호도 인정한 임종수의 노래 실력이었다.

 

신인가수의 길

 

임종수는 그 대회에서 입상은 못했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빨간 마후라>·<꽃 중의 꽃>을 작곡한 황문평 씨였다. 임종수는 얼마 뒤 황 작곡가를 찾아갔다. 그를 기억하고 있던 황 작곡가는 명함 두 장을 꺼내 한 장에는 작곡가 계수남 음악학원장에게, 다른 한 장에는 수도육군병원장에게 전하는 메모를 적었다. 수도육군병원장에게 보내는 메모에는 임종수 이등병이 근무 후 노래를 배울 수 있게 배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19656월경, 그는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옆에 있던 계수남음악학원을 찾아갔다. 계수남 원장은 그의 노래를 들어보고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느냐장학생으로 와서 음악공부를 하라고 쾌히 거두어주었다. 거처가 없던 그는 계수남음악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가수가 되더라도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겠다고 작심하고 남몰래 피아노 독학을 시작했다. 그때 독파한 시창교본이 훗날 엄청난 자산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가수 데뷔를 위해 임시원이라는 예명도 짓고 남상규·오기택·쟈니리·정원 등과 함께 시민회관 무대에 서기도 했다.

 

노래 취입 후 가수 포기, 작곡가 도전

 

1967년 작곡가 나화랑 선생에게서 <호반의 등불>·<항구의 인사> 두 곡을 받아 음반을 내고 꿈만 같은 가수로 데뷔했다. 일주일 동안 자신의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나화랑 선생을 찾아가 제 음색에 개성이 없고, 창법도 팝계열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 흐름에 맞지도 않고,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가수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나화랑 선생은 임종수 얼굴을 1분 동안이나 바라보더니 , 임종수는 정말 현명하다. 그런데 노래 잘하는 것으로 하면 너는 가수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면서 나 선생은 임종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오늘부터 작곡해라, 네가 생각하고 있는 멜로디를 악보에 적을 수 있느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 선생은 “1주일 뒤에 노래를 써가지고 오라고 했다.

작곡을 배워본 적이 없던 그는 혼자서 머리를 쥐어짜며 곡을 썼다. <돌아가 주마>라는 곡이었다. 나 선생은 그 곡을 피아노로 쳐보더니 처음 작곡한 사람이 이런 곡을 쓸 수가 없다. 너는 반드시 작곡으로 성공한다고 칭찬했다. ‘가수 임시원에서 작곡가 임종수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차창에 어린 모습> 들고 레코드사로

 

그는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곡을 썼다. 1970년 무작정 상경해 고생하는 자신의 처량한 삶을 빗대어 <차창에 어린 모습>을 썼다.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단 한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 눈감아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무명 작곡가가 이름을 얻는 방법은 유명 가수에게 곡을 줘 히트하는 것뿐이다. 당시 남자 인기가수 중에서도 나훈아가 부르면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훈아를 만나기 위해 그가 전속해 있는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매일 출근해 오후 4~5시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기를 석 달이 지나서야 나훈아를 만날 수 있었다. 사장실에 한참 있다 나온 나훈아의 어깨를 잡고 저 무명 작곡간데요. 나훈아 씨를 만나려고 3개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2절까지 부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두 곡을 1절씩만 부르겠습니다. 5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임종수는 나훈아와 함께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등 뒤에 서 있던 나훈아가 앞으로 나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훈아는 임 선생님, 지보다 더 노래를 잘 하시네 예하더니 그의 노래를 세 번 듣고 난 후 노래를 불렀다. 19703월 나훈아가 노래를 취입했다. 하지만 가사가 건전하지 못해 방송불가판정을 받고, <차창에 어린 모습>은 그렇게 방송 한번 못타고 사라지는 신세가 되었다.

 

불후의 명곡 <고향역>

 

197112월말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들렸다가 다시 만난 나훈아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아까우니 가사를 건전한 내용으로 고치고, 리듬도 트로트에서 고고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임종수는 중학교 때 형님 집이 있는 익산군 삼기면 황등역에서 이리역까지 통학하던 일이 생각났다. 제목을 <고향역>으로 정하고 노랫말을 쓰고 곡을 다듬었다. 197228, 나훈아가 <고향역>을 취입했지만 이번에도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1972년 나훈아가 오아시스에서 남진·이미자 등이 소속된 경쟁사 지구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며 박춘석 작곡 <물레방아 도는데>를 발표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오아시스 측은 묘수를 구상했다. 전국 방송국 피디(PD)들에게 긴급 설문을 돌렸다. 나훈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취입곡 중 히트 가능성 있는 노래 베스트 10’을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그 중 1위가 <고향역>이었다. 오아시스 측은 곧바로 <고향역>을 타이틀 곡으로 나훈아 독집음반을 내놓았다. 가을이 되자 전국에 <고향역> 노래가 울려 퍼졌다.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동한 출향인의 향수를 뒤흔든 것이다. ‘임종수 시대도 코스모스와 함께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1976년 발표된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임종수가 작곡한 두 번째 히트작이다. 이 노래는 전국민적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 카바레 금지곡이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남성들이 이 노래만 나오면 아내가 생각나 하나둘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이 노래에는 막둥이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어머니와,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믿고 온갖 고생을 마다한 아내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과 고마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남진 <모르리>·<빈 지게>

 

2002년 남진이 곡을 받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왔다. 남진을 위해 처음 만든 노래가 <모르리>였다. 멜로디를 들어본 남진은 반하고 말았다. “형님 연세에 어떻게 이런 노래가 나와부러요? 너무 좋소. 여기다가는 조운파 선생 가사를 붙여야 됩니다. 형님, 빨리 조 선생한테 전화 좀 하쇼.”

남진은 <모르리>를 취입하면서 임종수에게 또 다른 제안을 했다. “형님, 내가 전공이 마이너곡 아닙니까? 메이저곡으로 <모르리>를 취입했으니까, 내가 노래 부르다가 죽어 버릴 수 있는 노래, 형님이 한 번 만들어주쇼.”

임종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주마. 메이저곡(장조) <모르리>로 마음을 빼앗았으니 마이너곡(단조)으로 완전히 꼬리를 내려버리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멜로디가 찾아왔다. 여기에 <몇 미터 앞에다 두고>·<미쓰 고> 등의 노랫말을 쓴 조동산이 가사를 썼다. 이렇게 탄생한 노래가 <빈 지게>. 이 노래가 나왔을 때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빗발쳤단다. “<빈 지게> 때문에 아주 미치겠다라고. 남진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부르다가 죽는다고 말했다.

 

스타가수 제조기

 

7개음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다 보면 비슷한 음이 겹칠 수도 있을 텐데, 임종수 히트곡들은 비슷한 음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작품들을 히트시키며 여러 무명가수를 인기가수 반열에 들게 했다. 하수영(<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태진아(<옥경이박윤경(<부초>)·조항조(<남자라는 이유로>)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착한 여자>(인순이)·<애가 타>(장윤정)·<아버지의 강>(강문경)의 히트곡이 있으며, 최진희·문희옥·이창용·나미애 등 여러 실력파 가수들이 그에게서 곡을 받았다. ,

임종수는 한국방송(KBS) ‘전국 노래자랑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19801993), 국내 최초로 신설된 충청대 트로트가요학과 교수도 역임했다. 2011년에는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도서출판 동방의 빛)를 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는 20일 경에는 팔순기념음반도 발매한다고 한다. 임종수 작곡가의 변함없는 정진을 기원한다.

 

196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