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쪽빛한쪽(4) 빈 것만 모였구나

2022-01-26     선산곡 작가

 

노트북을 켜면 처음 나타나는 화면, 내가 찍은 사진인데 때가 지났다. 지난 만추 때 고향 강천산 계곡물 위에 뜬 낙엽을 찍은 것이다. 물에 비친 하늘은 푸른색이다. 하늘과 낙엽과 물. 물속의 하늘은 허상이고 그 허상 위에 잎사귀들은 떠 있다. 물도 흐르는 것이니 무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것은 그렇게 비어있는 것들이다. 모두 빈 것들만 모였다. 서둘러 그림을 지우며 가슴에 바람을 맞는다.

모처럼 눈이 내린다. 계절이 어느새 한 겨울의 중심에 있다. 대한(大寒)이 지났으니 얼마 뒤면 입춘(立春)이다. 입춘 무렵이면 한기(寒氣)는 마음에서 떠난다. 때론 춥더라도 인내라는 장막을 끌어내어 덮는다. 춘설(春雪)이 포근하다는 것도 그 마음 속 거래일 것이다. 춘심(春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느낌일 뿐이다. 남송 나대경(羅大經)의 시 한 그릇의 춘설이 제호보다 낫다 (一歐春雪勝醍醐·일구춘설승제호)’는 말도 다분히 장식적이다. 지난 가을 떨어진 잎사귀는 빈 것, 모처럼 내리는 눈도 빈 것. 봄 기다리는 마음도 빈 것. 모두 빈 것만 모였구나.

제호상미(醍醐上味)’는 불교에서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맛, 가장 숭고한 부처의 경지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