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사람처럼(5) 역사의 바깥25 우수리스크 최씨 수난기
채광석 시인
최재형을 생각하며
함경도 노비 기생의 자식으로
아버지 따라 일찍 연해주로 건너간 최씨는
어려서부터 사업에 눈을 떠 거상이 되었는데
두 명의 부인으로부터 4남 7녀를 두었다
러시아 군대에 소고기나 납품하며
주렁주렁 자식들 뒷바라지 일로 늙어갈 일이지
무슨 바람 들었을까 무엇에 흘렸을까
얀치혜 장미꽃 화원 딸린 서양 벽돌집엔
안중근 형제와 헤이그 밀사들이 머물다 갔고
노령 찾아든 망명객들 너도 나도 머물다 갔다
서간도 북간도 시베리아 떠돈 조선이
한 시절 제 온돌방처럼 언 꿈 녹이다 갔다
그 꿈이 너무 뜨거웠나 사나웠나
시베리아 일본 출병군은 1920년 사월
나이 육십 노인에게 총을 쏘아버렸다
장남 최운학은 1918년 백위파 군에 죽었는데
볼셰비키 포병장교였던 차남 최성학도
일제 밀정으로 몰려 스탈린에게 처형되었다
삼남 최 페트로비치는 알마타에서
평생 조롱을 먹고 살다 죽었고
1차 대전 참전병사였거나 단추공장 기술공이었던
다섯 사위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키르기스스탄에 숨죽여 살던 6녀 최 류드밀라 노인이
1996년 한국 대통령께 이런 편지를 썼다
‘추운 겨울은 닥쳐오고 난로 연료도 없고
장작 벨 힘도 물 끓여 운반할 기역도 없습니다’
일본군 러시아백군 스탈린적군 한인촌 파벌
세상 모든 아귀들의 손발톱에 구멍 숭숭 뚫린
고려인 최씨 가족의 삶과 운명을
시베리아 자작나무처럼 하얗게 불탄 한 시절을
오늘 나는 무슨 말 지어 꿰매고 달래야 하나
드릴 게 없어라 나는
여기 시로 지은 옷 한 벌밖에
채광석 시인. 1968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재학 중인 23세 때 등단했다. ‘대학 재학 중 등단’이라는 수사는 화려함 그 자체다. 하지만 등단은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등과는 화려함의 결이 전혀 다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에 절필을 한 후, 나이 쉰이 넘은 지난 2019년 2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펴냈다. <오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