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속에 시한줄(85)시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노래

글ㆍ그림 조경훈 시인ㆍ한국화가

2022-11-30     조경훈 시인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2005년>

고정희 (1948~1991) 전남 해남 출생

저서로는 시집 <초혼제>, <이시대의 아벨>, <지리산의 봄> 등이 있음

 

불교 사자성어에 맹구부목(盲龜浮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가 나무토막에 뚫린 구멍을 만나 세상에 나왔다는 우리 인간 존재의 귀중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귀하게 선택받아 나왔건만 세상은 호락호락 그렇게 잘사는 곳이 아닙니다. 먹고살기가 힘들었고,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한이 없어 가진 사람은 더 갖기 위해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거기에 힘없는 사람을 구박까지 합니다.

그래서 석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해라 했고, 이 세상 최고의 선은 자비라 말하면서 서로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예수는 산상에 올라 수훈을 외쳤는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 것이다. (중략)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받을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 것이다라고 두 성자가 부르짖은 이 말은 오늘 고정희 시인이 외친 상한 영혼을 위하여와 맥이 닿아 있어 내 가슴이 아픕니다.

고정희 시인은 여성운동가로 여성에 관한 시를 많이 썼는데 특히 안산의 시인으로도 불러지는 것은 이 시 한 편 때문입니다. -

일곱달 된 아기엄마 구자영씨는 /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 아침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 경기도 안산에서 여의도까지 / 경적소리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옆으로 꾸벅꾸벅 존다 / 차창 밖으로 사계절이 흐르고 /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있는 구자영씨 / 그래 저 십분은 /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 또 저 십분은 / 간밤에 시어머니 약시중든 시간이고 <중략>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여자가 받쳐든 한식구의 인식이 / 아무도 모르게 / 죽음을 향하며 /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이렇게 여성을 대신해 써 대던 이 시인은 19916월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망으로 끝을 맺었다. 참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