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사람처럼]무늬13 한 형의 안부를 묻는다

2024-01-16     채광석 시인

무늬13 형의 안부를 묻는다

 

채광석 시인

 

담장 장미꽃냄새 코를 찌르던

개봉동 어느 오르막길 끝집에

안경 쓴 한 형이 살았다

본업은 시인이었고 부업이

안경점 사장이었는데

최루탄이 폭설처럼 쏟아진 어느 늦가을

여기서 시 열심히 써보지 않을래.

개봉동 쪽방 한 칸과 낡은 286 컴퓨터 한 대를 선뜻 내주었다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섬세한 서정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목울대만 뻣뻣했던 시문 한 줄 한 줄마다

빨간 펜이 좍좍 그어지곤 했다

쪽방을 제대로 청소 못 하고 나간 날이면

손 글씨로 쓴 레드카드가 붙어 있었다

일상도 혁명가처럼 정결히.

무안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지만

왠지 그 형만 쭉 따라가다 보면

그 길 끝에 흰 빛 도는 세상이 서 있을 것 같았다

최루탄 털고 들어오는 늦은 밤이면

형이 끓여놓은 식은 김치찌개를 먹으며

새벽 시를 쓰곤 했었는데

혁명은 쉽사리 오지 않았고

난 군복으로 옷만 바꿔 입었다

그 뒤로 개봉동에 들르지 못했는데

아직도 그 오르막길에는

담장 장미꽃냄새 월담하고 있으려나

많이 늙었을 터인데 이 밤도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지는 않으려나

 

채광석 시인. 1968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인 23세 때 등단했다. 하지만 등단은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등과는 화려함의 결이 전혀 다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에 절필을 한 후, 나이 쉰이 넘은 지난 20192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펴냈다. <오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